[덴더라이브]덴더라이언 팬픽션 ~모니터 앞으로 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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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글에 참여해주신 분들과 더불어 게임에 대한 애정으로 비상업적 2차 창작(팬픽션, 팬아트 등) 활동을 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지수 루트 전반에 대한 스포일러로 가득합니다.  
 
  노트북의 바탕화면에 있는 노란색 민들레꽃 아이콘을 클릭했다. 이미 올 클리어 한 지 오래된 게임이지만 요즘도 심심하면 New game을 눌러 다시 시작하곤 했다. 소원을 이뤄준다는 마술쟁이가 존재하는 모니터 속 세계.
   
 이 게임에 나오는 모두를 다 좋아하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지수를 가장 좋아했다. 여주인공인 희정이에게 ‘밥주인’이라고 부르는 까만 고양이 남자. 사실 고양이보다는 개라고 하는 쪽이 더 신빙성 있는 것 같지만.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게임 속 시간이 흘렀다. 업데이트되면서 턴 수가 줄어서 상당히 편해지긴 했지만 돈을 모으기 위한 아르바이트는 여전히 싫었다. 그 순간 머릿속을 한 순간 스쳐지나간 것이 있었으니. 
   
 나는 잠시 게임 창을 내려놓고 바탕화면의 치즈모양 아이콘을 한번 클릭했다. 에디터를 사용하면 게임이 쉽게 질리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돈을 뻥튀기 해놓고 게임을 시작하면 게임 플레이가 무척 편하다는 유혹에 넘어가서 자주 쓰곤 했다. 이제까지 이 게임엔 에디터가 먹힐지 의문이라서 사용해보진 않았지만 오늘은 한 번 시도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러나서 세이브 파일이 꼬이고 그러진 않겠지…?”
 
  혼잣말을 하면서 치즈를 더블클릭했다. 오랜만에 사용해봐서 조금 헤매긴 했지만 곧 화면에 999990000₩이란 수치가 떴다. 왠지 이 게임은 에디터가 안 먹힐 것 같았는데 먹혔다. 이걸로 희정이는 지연이랑 운명의 불장난하는 누나들만큼 돈이 많아졌다.
일단은 꼭 해보고 싶었던 잡화점 싹쓸이를 해봤다. My inventory에 잡화점 아이템이 가득 들어찬 것이 엄청 뿌듯했다.
좋아. 오늘은 행복하니까 해피엔딩 봐야지!
   
 지수가 유일하게 고양이라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씻는 걸 싫어하는 점이다. 홀랑 벗고 나타난 지연이를 쫓아내 준 건 고맙지만 거의 한달 가까이 목욕을 안했다는 건 조금, 이 아니라 많이 깬다. 희정이가 눈치 채지 못한 거 보면 냄새가 그렇게 심하진 않은 모양이지만…… 
 
  「“더럽다고!! 이 바보야!!”」
 
  희정이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었다. 모니터 속 지수는 정말 싫은 표정을 하고 있다.
 
  「“…난 목욕 안 하는 남자는 싫어.”」
 
  결국 희정이는 지수에게 직구를 던진다.
 
  「보통 누구나 다 그렇다. 목욕 안 하는 게 매력 포인트는 아니잖아.」
 
  그렇지. 나는 희정이의 속마음을 보고 풉 웃었다. 그래도 뭐, 지수는 안 씻는 거 빼고는 정말 괜찮은 남자니까. 모니터 뚫고만 나온다면 삼일정도 안 씻는 건 참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 진짜? 너 저 고양이처럼 맨날 씻는 놈이 좋냐?”」
  「“응… 안 씻는 사람보다는 훨씬 낫지.”」
 
  나는 웃으면서 지수의 풀죽은 모습을 보기위해 다음으로 넘어갔다. 지수는 싫은 표정으로 믿기지 않는 다는 듯이 희정이에게 다시 묻는다.
 
  「“…너 진짜 자주 씻는 놈이 좋아?”」
  「“응, 당연하지.”」
 
  마우스를 클릭하면 다음대사가 뜬다.
 
  「“거짓말.”」
 
  “어?”
 
  생각하고 있던 것과 달리 나오는 대사에 나는 얼빠진 소리를 냈다. 지수의 스탠딩CG는 팔짱을 싱긋 웃고 있다.
   
  이거…… 아니지 않나? 
   
  지수가 여기서 거짓말이라는 대사를 했던가? 그간 과제다 뭐다 게임을 오랜만에 하는 거고 내 기억력이 상당히 안 좋은 것도 사실이지만 여기서 지수는 희정이에게 직구를 맞고 풀죽은 모습으로 씻으러 가는 거였는데……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 찬 가운데 나는 일단은 계속 진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우스를 움직였다.
 
  「“내가 씻든 안 씻든 상관없이 너는 날 좋아 할 거야.”」
 
  자신만만한 지수의 말……. 달라, 다르다.
지수는 루트 초반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아니, 누구든 그랬다. 게임의 초반엔 아무도 희정이의 마음을 자신하지 못했었다.
 
  「“그래도 네가 싫어하는 것 같으니까 지연이 녀석 나오면 씻으러 들어갈게.”」
 
  그리고 화면이 바뀌며 다음 날로 넘어가며 희정이 집 구조가 떴다. 지수는 집 안에 없었다. 나는 내가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모니터를 보고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뭐야???”
 
  혹시 덴더라이언 100번째 New game하면 새로운 루트로 플레이할 수 있는 그런 거라도 있었나??? 그렇지 않고서야 지수가 갑자기 잘 가다가 바뀔 수가 있나??
 
  “으~~!!”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해봤자 아무것도 해결이 안 난다. 어떤 조건을 만족해야 접어들 수 있는 루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플레이를 계속 해보자. 오늘이 토요일이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주말 전까지 지수는 집 안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주말이 되자 나는 망설임 없이 외출하기를 눌렀다. 지수를 선택하고 카페로 갔다.
 
  「“뭐 마실래?”」
 
  그리고 익숙한 선택지 두 개가 뜬다. 아메리카노, 카라멜 마키아또.
  지수는 달달하다면서 카라멜 마키아또를 좋아하니까…… 나는 망설임 없이 카라멜 마끼아또를 선택했다.
 
  「“정말 이거 마실래?”」
 
  또 다르다.
 
  「“내가 좋아하는 거 말고 네가 좋아하는 걸로 골라.”」
 
  그리고 다시 한 번 선택지가 떴다. 아메리카노, 카라멜 마키아또.
  다시 내밀어진 선택지 앞에 나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되었다.
   
 엔딩에 손톱만큼도 영향을 주지 않는, 정말 별 거 아닌 선택지 하나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모니터 밖의 나는 카라멜 마키아또 보다는 아메리카노를 더 좋아했다. 하지만 내 취향 같은건 게임하는데 아무런 상관없었다. 지수가 좋아하는 걸 나도 좋아해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 
   
 너랑 함께 있는 희정이는 카라멜 마키아또를 좋아할 텐데. 
  다시 내밀어진 선택지는 희정이가 아니라 꼭 나를 향해 내밀어진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그거 맛있냐? 난 쓰기만 하던데...”」
 
  나는 모니터 앞에서 머그잔 한 가득 담아온 냉수를 들이켰다. 내 취향대로 고르라면서. 그러는 네가 먹는 냠냠스낵은 맛있냐? 난 사브레가 더 맛있을 것 같던데.
 
  「“하긴 어차피 너는 못 마시니까 달든 쓰든 상관없겠지만.”」
 
  생각 없이 화면을 클릭했다가 뜨는 대사에 사레가 들렸다. 이 루트의 지수는 정말로 이상하다. 못 마시니까 상관이 없다니?
 
  「“야, 오늘도 재밌었냐?”」
  「“다음에도 또 가자.”」
 
  그 다음은 평범하게 넘어갔다. 주말 데이트가 끝나고 다시 한 주가 시작된다. 지수는 집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희정이는 거실에서 지해와 이야기를 나누고 욕실에서는 지연이와 마주치고 베란다에서는 지은이를 관찰했으며 침실에서는... 정확히는 책상에서 지우와 함께 재무관리 책을 읽었다.
 
  「“있냐? 그런 거냐?”」
 
  지수가 나와 다짜고짜 남자가 있냐고 묻는 짧은 이벤트였다. 물론 지금 희정이에게는 아무도 없다. 베드 루트를 탈 마음이었으면 지해한테도 말을 걸었을 테지만 오늘은 해피엔딩을 볼 작정으로 달렸으므로. 그렇게 묻는 지수가 조금 답답했다. 희정이 같이 착실한 여자가 너 안보는 어디에서 남자를 만들어오겠냐. 나도 희정이도 지금 관심 있는 남자는 너뿐인데.
   
 게임 속 희정이는 당황하며 없다고 말을 한다. 
 
  「“어… 없……”」
  「“됐어.”」
 
  ?
   
 이보세요, 저기, 지수야, 희정이 말 다 안 끝났는데??? 
 
  「“있어도 상관없어.”」
 
  또 기억하는 것과 다른 대사가 뜨기 시작했다. 분명 여기선 희정이가 더듬거리며 없다고 얘기하고 지수는 그 대답을 듣고 기분 좋게 웃으며 넘어가는 거였는데. 나는 이번엔 지수가 어떤 말을 할까 기대를 하며 클릭했다.
 
  「“여기선 다른 사람이 아닌 날 좋아해주면 돼.”」
  「“다른 놈들 말고 나를.”」
  「“이번에도, 다음에도.”」
 
  이번에도, 다음에도……? 이게 무슨 말이야. 지금의 지수는 알 수 없는 말만 한다. 그런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지수가 저런 말을 뱉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조금…… 설렜다. 이런 취향이라 미안합니다, 지수야.
 
  「“집으로 가자. 머리 썼더니 피곤해. 냠냠스낵 먹고 싶어.”」
 
  “……헐?”
 
  진짜로 뭔가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수가 머리를 써서 피곤하다니……? 이거만큼 확실한 잘못됨의 증거가 없었다. 어떤 조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지수는 해피엔딩루트와도, 베드 엔딩 루트와도 다른 루트를 타고 있는 게 확실했다. 커피를 다시 고르라거나, 너는 못 마신다거나, 남자가 있어도 상관없다거나, 마지막의 말들은 전부 다 뜻 모를 말들이다.
 
  “아니……. 이상한 게 아니라.”
 
  나는 찬찬히 지수의 말을 곱씹었다. 선택지가 떴던 것들, 남자가 있다고 상관없었다고 했던 말들, ‘여기선’이라는 단어, 그리고 이번에도, 다음에도……. 이건 마치.
   
 마치 이게 컴퓨터 게임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이. 
  
  이번의 지수는 이게 반복되는 게임이라는 걸 알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그 아리송했던 말들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거실에 가 소파에 앉아서 쉬기를 클릭하자 지수가 나타났다. 선물을 할까, 고민하다가 대화를 하면 뭔가 지금의 루트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화하기를 누르자 싱긋 웃는 지수가 나타난다.
 
  「“여기 앉으면 좀 더 편하게 생각할 수 있어.”」
  「“지금쯤 너는 거기에서 놀라고 있으려나.”」
  「“내 말 진지하게 듣고 있는 거냐? 너무 빨리 다음 말을 재촉해.”」
 
  나는 마우스 버튼을 클릭하던 손을 멈췄다. 지수의 말이 방금 내가 영혼 없이 한 클릭질을 지적하는 것 같아서 뜨끔했다. 그래, 계속 맘에 걸렸지만 대사가 이상하다. 분명히 옆에 있는 건 희정이인데…… 그런데 지수가 말하고 있는 건 희정이가 아닌 것 같다. 내 추측에 의하면 이 지수는 여기가 게임이라는 걸 알고 있고, 그리고…… 그리고,
나를……
   
 잠깐 망설이다 클릭을 하자 그 다음 지수의 말들이 떴다. 
        
 「“이제 좀 진정이 됐어?”」 
  「“지금쯤 눈치 챘지?”」
  「“이번 게임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나는 알고 있었어.”」
  「“지금 이 말도 다 듣고 있지, 너는.”」
  「“널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건 네가 내 눈 앞의 희정이라는 것뿐이야.”」
  
  분명히 ‘나’를 말하는 거다.
   
 
 지수가 나를 알아봐준다. 
   
 비록 내 얼굴도 목소리도 희정이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도, 보여줄 수도 없지만 그래도 지금 지수는 희정이 뒤의 나를 가리켜 말하고 있다. 정말 이상한 일인데…… 이런 일도 있다고 캡쳐해서 제작사에 신고라도 해야 하는데. 그런데 마음이 떨려서 그냥 화면을 보고 있는 것 밖에 못하겠다.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과자의 집을 찾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알겠더라.”」
  「“아니다. 갑자기 치즈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했던 날부터야.”」
 
  치즈냄새? 웬 치즈냄새? 희정이가 치즈를 좋아했었던가? 하다가 내가 쓴 에디터의 아이콘 모양이 떠올랐다.
   
 아, 치즈냄새…… 
   
 미안하다, 지수야. 비위가 강한 지수로서도 그건 참기 힘든 냄새였는지 표정이 좋지 않다. 
 
  「“그 이후로 네가 이상했어. 갑자기 물건을 잔뜩 사오지를 않나.”」
  「“그리고 행동 하나하나가 이전에 어디서 본 것 같았어. 아니, 봤다기보다 예전에 본 것 같았어.”」
  「“착각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떠올리려고 노력하니까 있는 지도 몰랐던 기억들이 보이더라. 네 이야기들. 나와 너의, 아니, 나와 희정이의 이야기, 다른 놈들의 이야기…… 그리고 갑자기 깨달았지. 아, 여긴 게임이구나. 마술쟁이의 게임이 아니라 너의 게임이구나. 나는 그 속에 있는 거구나.”」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닿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도.”」
  「“나는 일종의 오류지. 그 이전의 게임들도, 널 알아봐서도 안 되는 건데 말이야.”」
 
  새로운 루트가 아니구나.
   
 지금 날 알아보고 있는 이 지수는 우연히 일어난 오류로 인해서 생겨났다. 그래서 날 알아봐주는 거구나. 이제 놀란 것도 어느 정도 가셔서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오류라도 상관없었다. 그 오류 때문에 이전의 세이브데이터가 몽땅 못 쓰게 된다고 해도 괜찮았다. 지수가 나를 알아봐주니까. 모니터를 뛰어넘었더라면 더 좋았을 테지만 그건 마술쟁이가 와도 안 될 것 같은 일이고……. 이것만으로도 한정 굿즈 이벤트에 당첨 되는 것보다 100배는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너무 말이 많은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방금도 말했지만 나는 오류니까. 갑자기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잖아.”」
  「“언제 사라질 진 모르겠지만…”
 
  눈을 감고서 지수가 말했다.
 
  「“…같이 오래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
 
  모습이 스르륵 사라지고 또 하루가 갔다.
   
 나는 잠시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게임을 업데이트 했을 때를 떠올렸다. 새로운 버전의 게임에서 이전 버전의 세이브파일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에러메시지를 띄우며 멈췄다. 이번 게임의 지수가 오류라면 언제든 그렇게 꺼질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나를 알아보는 지수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엔딩을 보기 전에 꺼져버릴 수도 있고, 엔딩을 봐도 끝이다. 세이브도 안 된다. 내가 지수를 잡아둘 방법은 없었다. 내가 지수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해줄 방법도. 
   
 좋아해, 고마워, 그런 말들을 대신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열심히 호감도를 채우고 스탯이 목표치에 모자라지 않게 유지하는 것뿐이었다. 
   
 2012년 10월, 11월, 12월, 2013년 1월, 2월… 달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간들이 흘러갔다. 지수는 이따금 배드엔딩 루트에서 그러듯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오기도 했다. 마술쟁이와 만나는 이벤트 이후에는 매일매일 희정이와, 아니, 희정이 뒤의 나에게 말을 해주었다. 한 달. 현실에서도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은 마우스 클릭 몇 번에 빠르게 지나갔다. 
 
  「내일 수업은 경영학 설계… 그리고…」
 
  마지막 밤이었다. 이제 곧 엔딩이 눈앞이었다. 희정이는 졸업을 앞두고 침울해 했고 모니터 앞의 나는 오늘이 토요일이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하며 마찬가지로 침울하게 그 밤을 맞이했다.
 
  「“희정아.”」
 
  내 이름이 아닌 그 이름이, 이제 나를 부른다는 걸 나는 알았다.
 
  「“너, 무슨 일 있어?”」
 
  평소와 달리 가라앉은 지수를 보고 ‘희정이’가 물었다. 지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게도 지수의 대답은 필요 없었다. 아침이 밝아오면 지수는 예정대로 본래의 세계로 돌아간다. 그리고 기억을 잃고 다시 희정이의 곁으로 오겠지만, 그때는 ‘나’를 모르겠지. 그러니까 이 밤은 나와, 지수와, 희정이의 마지막 밤이었다.
 
  「“처음에… 내가 널 불렀을 때가 기억나?”」
  「“너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기뻤어.”」
 
  본래라면 음성이 나와야하는 이벤트였지만 대사가 바뀌면서 지수의 목소리는 한참 전부터 나오지 않았다.
   
 
  「“이번의 ‘나’는 널 만나기 위해 시작된 거야.”」
 「“희정이 네가 왜 그렇게 사랑스러웠는지 그 이유도 알았지.”」 
  「“네가 날 보려고 열심히 노력해줬다는 거 알아.”」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기억하지 못해서. 잊어버리기만 해서.”」 
  「“지금 이 순간이 지나고, 새로운 게임이 시작되면 나는 널 기억하지 못할 거야.”」 
  「“마술쟁이가 내 기억을 가져갈 테지만.”」 
 「“네가 날 기억할 테니까.”」 
 「“네가 게임을 시작하면, 어디에 있던, 누구랑 있던 찾아가서 뺏어올 거야.”」  
 「“아무데서나 나타나서 네가 딴 놈이랑 말 한마디 못하게 할 거야. 나랑만 얘기하게 할 거야.”」 
 
   
 웃음이 나왔다. 지수라면 정말 그럴 법도 했다. 
   
 하지만 지수야. 내가 다음번의 게임에서 널 또 다시 택할 수 있을까? 이제 어떤 지수를 봐도 네가 떠오를 텐데. 내게 많은 말을 해줬던 네가, 날 알아봤던 네가 생각이 날 텐데. 
 
  「“사랑해.”」
 
  몇 번이나 네가 희정이에게 했던 말. 하지만 지금의 이 말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네가 내게 하는 말.
 
  「“내 세계를 열어주고 날 선택해 준 널 사랑해.”」
  「“사랑해.”」
  「“다음에도 네가 날 사랑해주면 좋겠어.”」
 
  그 말을 끝으로 화면이 새하얗게 변했다.
   
 희정이는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지만 팔을 뻗어 지수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희정이가 지수 옆에 있어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직 이야기가 남아있었지만 나와 지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었다.
   
 한숨이 쉬어졌다. 그제야 뻑뻑해진 눈을 감았다. 모니터의 빛이 눈을 감아도 느껴진다. 
  지수야. 단 한 번이라도 네게 내 목소리가 닿을 수 있다면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고마워.
   
 나도 널 만나고 싶어.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닿지 못할 말들을 마음으로 속삭이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달칵이는 소리가 아침을 불러왔다.
 
 
* * *
 
 
  반짝이는 금색의 눈을 가진 남자가 한 그림 앞에 멈춰서있다. 남자는 그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림으로부터 기억하지 못했던 과거가 전해져온다. 남자가 했던 약속의 말들이.
   
 나는 그 약속을 알고 있다. 
   
 “어디에 있든, 누구랑 있든 찾아가서 뺏어올 거야. 그 약속… 지금 지키러 갈게.” 
   
 몇 번이나 남자가 했었던 약속이다. 
   
 나는 남자의 이름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남자는 내 이름을 모른다. 그 약속이 누구를 향한 것이었는지도. 
   
 하지만 괜찮아. 지수야. 나는 기억하고 있을게. 
   
 마우스의 버튼을 눌렀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의 소리가 났다. 












  깊은 수면 속 가라앉았던 의식이 천천히 부상하는 느낌에 은발의 남자는 눈을 떴다. 억지로 누군가가 잡아 일으키는 느낌. 그런 주제에 서두르지 말라고 어르듯이 세계는 여전히 느릿하게 자전하고 있었다. 남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여기가 어렴풋이 어떤 곳인지 인지할 수 있을 뿐, 남자가 알 수 있는 정보는 무엇 하나 제대로 제 몸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 없었다. 갈색의, 아늑한. 그나마 가장 먼저 인지한 색에서부터 점점 넓혀 생각의 물꼬를 튼다. 곧 남자가 다른 것을 찾아내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무언가가 조금씩 흘러나와 가랑비처럼 공기를 적셨다. 눈으로 보고 뇌로 생각하며, 중추 신경계를 찌릿하게 울리는 것과는 조금 다른 감각이었다.
 
 
  문장을 이루지 못한 단어들이 띄엄띄엄 나열되며 제 주변을 기웃거리는 것을 느껴졌다. 남자는 다음으로 전달된 인지(認知)를 펼쳤다. 그가 있는 곳은 전체적으로 따듯한 색채의 공간이었다. 아무도 없지만 어디에선가부터 올라오는 웅성거리는 말소리가 올바른 언어 체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허공에서 흩어져 사라진다. 기묘하게도 남자는 어지러운 머릿속과는 다르게 그것들을 스펀지처럼 빠르게 흡수하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에 엉기는 공기 하나조차 모든 것이 친숙하다고 생각했다. 조잡하지만, 날 때부터 그런 형태였던 것들이 살짝 다가와 오랜만이라고, 자신에게 그리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그것도 잠시였다. 소리의 형태를 인식한 남자가 갑작스럽게 고개를 아래로 처박았다. 맞지 않는 톱니바퀴를 억지로 끼워 맞춰 돌리는 것 같은 심술궂은 두통이 엄습한 까닭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머리를 잡아 누르고, 반죽을 하는 것 같이 힘을 가하는 느낌이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을 처음 해보는 것처럼 뭉텅뭉텅 숨을 토해내며 남자, ‘지해’는 천천히 속눈썹을 내리 깔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고통에 겨워 그 작은 동작을 해내는 데에도 힘이 부쳤다. 그렇게 한동안 머리를 움켜쥐고 난 뒤에야 지해는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에선가 많이 본 것 같다는 묘한 기시감을 감지해냈다. 누군가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공간. 분명 처음 보는 공간이었다. 아니, ‘처음 보는 공간’이어야 했다.
 
 
  무언가가 이상하다고, 까끌한 입 안에서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고 나서야 지해는 자신의 앞에 누군가가 앉아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느다랗고 예쁜 눈이 언뜻 둥근 곡선을 그리는 듯 했다. 머리에 까만색 리본을 하고 하얀 점이 박힌 파란색 물방울무늬 원피스를 가지런하게 입은 여자가 정갈한 음성으로 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지해야.
 
 
  다정하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지극히 일상적인 톤으로, 무슨 케이크를 좋아하냐고 묻고 있다. 방금 전까지 이것저것 복잡하게 얽어 생각하던 지해에겐 그저 생뚱맞은, 지극히 소박하고 평범해서 오히려 당황스러운 질문이었다. 지해는 대답을 미루고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렸다. 막 사서 입은 것처럼 말끔한 새 옷을 보면서도 지해는 어째선지, 그것이 무척이나 낡고 퇴색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쭉 이 자리에, 인형처럼 가만 앉아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 그들의 주위에는 분명 보이지 않는 먼지가 차곡차곡 쌓여 사방을 풀풀 날리고 있을 터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갑갑할 리가 없었다. 이렇게 숨이 막힐 리가 없었다.
 
 
  그 순간 보이지 않는 장막처럼 남자를 가로 막고 있던 첫 번째 벽이 무너져 내렸다. 수면 아래 깊숙한 곳에 처넣어졌던 의식이 드디어 맞물린다. 엄청난 속도로 무언가가 회전했고, 지해는 침착한 얼굴로 내렸던 시선의 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목이 삐거덕거리며 보이지 않던 먼지에 형태가 생겼다. 빨갛고 파랗고 푸른 얼럭이 눈앞을 스치는가 싶더니 다시 그녀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지해는 침묵했다. 그녀 또한 그를 지긋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자신을 지켜볼 것 같은 올곧은 시선. 아니, 저것은 올곧은 시선이 아니었다. 그저 텅 비었을 뿐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도 없었고, 애초에 무언가를 생각하는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저렇게 속이 빈 눈을 할 리가 없었다.
 
 
  아아. 그렇구나. 지해는 허한 미소를 지으며, 언젠가부터 너무나 자연스럽게 입술 위로 각인된 말을 읊었다. 자신조차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말을 걸어오며 저에게 옮긴 소박함, 평범함을 똑같이 읊어 되돌려주었다.
 
 
  기시감의 정체를 알았다. 잔인하게도, 남자는 애써 무시하고 외면했던 진실과 다시 한 번 대면하고 있었다. 그 자신조차도 이것이 몇 번째인지 알 수 없었고, 이것이 ‘약속된’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에 의해 다시 한 번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받아들이지도 못 하고 제 의지로 치워버릴 수도 없는 시간의 어느 틈바구니에 있었다.
 
 
  과연 몇 번째일지 헤아릴 수도 없는 수많은 공백의 기억 중 하나로 남자는 되돌아온 것이었다.
 
 
 
 
  지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연한 파스텔 톤의 하늘빛을 머금은 세계. 오늘도 어디로부터 내리쬐는지 모를 햇빛이 듬성듬성, 성의 없는 나뭇잎 사이를 통과해 자신을 주장하고 있었다. 아아. 예의 무기력한 하늘이다. 지해는 앞서 걷는 그녀의 두 어 발자국 뒤에서 회색빛 아스팔트를 구두로 살짝 짓이겼다. 그래봤자 바위에 계란을 치듯 짓이겨진 건 아스팔트가 아닌 그곳에 몸을 비빈 구두 쪽이었다. 아스팔트 위에 드리워진 얼럭 같은 햇빛. 나무가 많아서 그런지 나뭇잎이 아니라 오히려 햇빛 쪽이 더 그림자 같았다. 빛나는 초록. 바람 불면 부는 대로, 사람 지나가면 지나가는 대로 흔들리는 회색빛 나뭇잎. 하얀 햇빛 그림자.
 
  지해는 차가운 얼굴로 그것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들고 있던 봉지가 놀란 듯 바스락바스락, 작게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를 내었다.
 
  지해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없이 ‘현실’이란 곳과 가까이에 위치한, 하지만 모조리 그곳에 있는 것들을 흉내 낸 모조품 따위로 채워진 이상한 세계.
 
 
  
  모두, 가짜다.
 
 
 
  이런 것들에 대한 자각을 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 말끝이 다소 흐려지며 끝나는 이유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지해는 확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해는 자신의 조각난 기억들을 손을 뻗어 어루만졌다. 기억은 순간의 기록이다. 우습게도, 바짝 말라 비틀어져 사라져간 것들에 지해는 처음으로 그리 생각했다. 잊히고 버려진 가여운 것들이라고. 방금 전까지도 누구보다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던 주제에, 그는 무너질 듯 연약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들마저 모조리 놓쳐버린 자신이 생각나서. 또, 앞으로 놓게 될 자신도.
 
  지해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존재, 그리고 그것에 담긴 의미. 모든 게 새벽의 물안개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저 앞을 뿌옇게 막아서서 도리어 피하고 싶게 만드는 자욱한 것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가야할 길은 보이지만 너무나 멀었고, 막아선 안개는 제 몸으로 단단하게 앞을 둘러치고는 자신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더 이상 파고들면 위험하다고. 그 ‘더 이상’과 ‘자신이 파고들려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자신의 존재 이유와 여부, 그러니까 ‘본능’에 가까운 무언가일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추측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것도, 그것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지해는 앞서 걷는 그녀의 뒤에 슬그머니 따라 붙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터덜터덜 흔들리는 하얀 손을 한 번 움켜쥐어 보았다. 그녀가 깜짝 놀랐다는 얼굴로 자신의 이름을 더듬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영락없이 수줍은 소녀 같은 얼굴로 발그레하게 붉힌 뺨을 보며, 지해는 마주 웃었다.
 
  이상하다.
 
  이번엔 길게 뻗은 손가락 끝에 자신의 손가락을 살짝 덧대고, 깍지를 꼈다.
 
  이렇게 잡았다면, 자신도 채워지는 것이 있어야 할 텐데.
 
  기아감이 들끓으며 지해의 얼굴 위로 낙담의 기색이 떠올랐다. 낙담은 곧 체념으로 바뀌었고, 지해는 인정해야함을 다시 한 번 절실하게 느꼈다. 동시에 형연하기 힘든 무언가가 울컥울컥 치솟아 목구멍을 쓰리게 했다. 부정한 적은 없었지만 외면하고 있던 것을 제대로 보지 않으면, 이렇게 확인 사살 당할 때마다 자신이 고통스러울 것을 알았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은 지우지 못한 옛 그림자도, 눈앞에 있는 그녀도 아니라고.
 
  조그맣게 무언가가 회오리쳤다. 지해는 싸하게 올라오는 속을 다잡았다. 환상이라기엔 지나치게 선명한 그녀는 자신의 기억을 가로막은 것들과 같은 물안개일까. 눈에는 보이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닿아도 아스라이 사라져 흐려지고 지나칠 수밖에 없는. 하지만 어느 샌가 뒤돌아보면 분명 그 자리에는 존재하고 있는, 그런.
 
  지해는 반대쪽에서 터덜거리는 자신의 빈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했다.
 
  어쩌면 물안개는 그녀가 아니라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금발 머리의 남자였다. 검은 모자 안에 얼룩 토끼 귀를 숨긴 남자가 그를 향해 고개를 까딱거렸다. 지해도 고개를 조금 숙여 마주 인사했다. 검은 모자를 고쳐 쓰는 하얀 손 아래로 형태를 갖춘 먼지가 떨어져 내리는 환영이 보였다.
 
  지해가 남자의 이름이 기억해낸 것은 한 박자 뒤였다. 그가 아는 남자의 이름은 ‘지우’다. 그 외에도 분명 받은 이름이 있겠지만 이곳에선 그의 본명이나 애칭을 부르는 이가 없으니 그가 아는 이름은 그것 하나다.
 
  잠깐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작위적인 명랑함이나 밝은 분위기를 만들 줄 모르는 두 남자가 평소에 인사를 건네는 화기애애한 일도 없었기에, 지해는 그저 지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 좋을지, 그게 아니라면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지우는 뚱한 시선이 기분 나쁘다는 듯 노골적으로 눈썹 사이를 일그러뜨리면서도 먼저 말을 꺼냈다. 표정하고는 상반된 담담하고 담백한 미성이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너, 내 이름은 기억해?”
 
  지해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3초. 지해는 먼저 물어도 될지 잠깐 망설였지만, 먼저 이름에 대한 얘기를 꺼낸 것으로 허락 받은 셈 치고 물었다.
 
  “당신은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나요.”
 
  지우는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작게 웃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어딘가 천진한 구석이 있는 미소였다.
 
  “아니. 불린지가 한참이거든.”
 
  지해는 멍청하게 되묻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지해는 잠시 이름을 알려줄까 고민했다. 그의 진짜 이름은 자신도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이름이라도 알려주는 쪽이 좋지 않을까, 하고. 지우는 그런 속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자신의 손을 휘휘 내저었다.
 
  “어차피 또 잊을 건데 굳이 알 필요도 없어.”
  “……역시 알고 있었군요.”
  “아마 전부 알고 있을 걸. 그 미친 고양이놈들이나, 네 도련님이나. 이 게임을 주최한 그 녀석이나. 이젠 확인할 길도 없지만.”
 
  도련님. 지해의 입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꾹 다물렸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 그녀는 방으로 들어간 상태고, 현재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은 지우와 지해 둘 밖에 없었다. 지해는 잠깐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우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지해를 스쳐 지나갔다.
 
  “그럼 잘해보던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사라졌다. 지해는 굳게 닫혀 다시는 열리지만 않을 것 같은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단순히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일련의 동작이 아니라,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지해는 지우가 했던 말을 입 안에서 곱씹었다.
 
  불린지가 한참이거든.
 
  아마 전부 알고 있었을 걸.
 
  이젠 확인할 길도 없지만.
 
  “……그럼 잘해보던지, 라고.”
 
  그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은 응원이 아니었다. 좀 더 습하고 눅진한 것이었다. 선택된 자를 보며 다시 모든 것을 잊어버릴 준비를 하는 그의 말에는 온갖 감정이 양념처럼 뒤섞이고 버무려 잘 알 수 없었지만, 그 속에서도 유독 강렬하게 전해지는 것이 있었다. 원망과 탄식. 자신은 아니라는 체념. 다리부터 시작해 진득하게 엉겨 붙는 익숙한 것들을 지해는 한 손으로 쳐내어 간단히 없애버렸다.
 
 
 
  얼마 안 있어서 집안의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카노스에서 왔다는 얼룩 토끼 남자도, 검은 고양이와 주황색 고양이도. 그들은 지해가 보기에 놀라울 정도로 덤덤하게 인사를 하며 사라져갔다. 지해는 구태여 인사하지 않았다. 또 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것이 맞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인사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한 번 더 잊혀지고, 잊으러 가는 것임을 알기에. 방법이 다를 뿐 자신도 다른 길로 한 바퀴 빙 돌아 사라질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의 도련님만은 후견인인 지해가 집에 남아있다는 이유로 집에 남을 수 있었다. 거실에서 아삭아삭 사과를 먹는 지은이는 본 지해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빠른 속도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 곧 이 작고 완결된 세계에 다시 한 번 끝이 다가온다는 뜻임을 지해는 알고 있었다. 그것을 일상의 풍경에서 문득 문득 실감할 때면 무언가가 양쪽에서 쥐고 흔드는 느낌이었다. 끝. 지해는 입안에서 그 말을 살짝 굴려보았다. 가장 실감나게 다가오는 말 같으면서도 한없이 낯선 단어가 형태 좋은 입술에서 툭툭 떨어졌다. 겹치고 흔들리는 활자가 바닥으로 낙하했다.
 
  톡.
 
  지해는 그저 그곳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보다 그것을 마주한 자신의 얼굴이 먼저 그려졌다. 지해는 자신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가끔씩은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안개 너머에 있을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저 끝이라는 것에 먹혀버리는 게 아닌가, 하고. 이곳에 있는 자신도, 기억도.
 
  먹히는 것은 두렵지 않다.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는 자신에게 저장된 무수한 기억들처럼 그녀가 곧 퇴색할거라 믿었다. 언젠가 당신의 속에서 많고 닳은 기억 중 하나가 되고, 다른 기억들에 빨려 들어가 사라질 것이라면. 잊힐 것이라면. 누군가의 이기적이지만 간절한 욕심처럼 잊지 못할 무언가가 되는 대신에 차라리 자신의 존재가 서둘러서 그녀에게 파묻히길 바랐다.
 
  기억은 순간의 기록이다. 그것을 말한 것은 그였지만, 사실 그런 것 따위 그는 알 수 없었다. 그와 그녀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 그의 하루가, 어쩌면 모든 것을 바친 인생이 그녀에게 있어선 한 줌의 모래 같은 찰나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절망스럽고 무기력했다. 기억도, 순간도, 과거도, 미래도. 정을 주기엔 그녀는 그에게 있어 너무나 멀고도 가깝고, 이 꿈이 머지않을 미래에 깨질 것을 알고 있었다.
 
  한 때 그녀와 행복해지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얇지만 단단하고 한없이 두꺼운 넓은 유리 너머의 살아 숨 쉬는 따듯한 당신에게 손을 뻗고, 만질 수 있는 날이 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기에 놓지도 않지만 잡지도 못하는 애매한 곳에서 멈춰버렸다. 그녀가 항상 찾아오는, 언제까지고 변함없을 방황하는 여름. 고민하는 초록과 어지러운 회색 속을 형체도 알 수 없게 뭉그러뜨려도 소용없었으니까. 왜냐하면 그를 포함한 그들은 흐르지 않는 과거와 오지 않을 미래 어디 중간 즈음에 살아 숨 쉬는 존재들이었으니.
 
  아아. 지해의 눈동자 위로 달빛 같은 푸르스름한 기운이 떨어졌다.
 
  곧 있으면 길고 아주 오랜 잠을 잘 시간이었다. 다시 그녀가 깨우러 올 때까지, 유통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깊고 어두운 세계를 만끽할 차례가 돌아왔다. 몇 번째인지 모를 1년의 굴레가 천천히 돌아갈 여름의 시작점에서 얌전히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겠지.
 
  지해는 눈앞의 여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정교한 세공을 가한 유리 장식물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뺨을 어루만졌다. 솔직하게도 금방 분홍빛에서 붉은 빛으로 발그레 물든 곳에서 전해지는 희미한 온기를 오히려 괴롭다는 얼굴로 지해는 가만 응시했다. 그러고는 계속 이런 얼굴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황급히 쓴 미소를 거두고 자그만 웃음을 입가에 담았다. 아마도 저 눈 너머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얼굴도 목소리도 모를 누군가를 위해.
 
  알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다. 백색의 텅 빈 기억 칸을 몇 개씩이나 자신에게 할애하며, 자신을 여즉 찾는 이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얼굴이 보고 싶었다.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가 듣고 싶었고, 이런 흐릿한 눈이 아닌 수많은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을 선명한 색채의 눈이 갖고 싶었다. 그것을 가지진 못하더라도, 딱 한 번만 보기라도 한다면 이 부질없는 아픔과 이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고분고분 수긍했다. 대신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 욕심을 부릴 수 있다면.
 
  “……꼭 잊어야 한다면, 차라리 잊혀 지겠습니다. 그 편이 나아요.”
 
  잊고 싶지 않아요. 더 이상 당신을 잊고 싶지 않아요.
 
 
  지해야?
 
  
  ‘희정’의 목소리 위로 낯선 목소리가 잠깐 겹치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졌다. 지해는 순간, 아주 잠깐, 나노로 쪼개도 시원치 않을 만큼의 찰나였지만 그녀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무언가를 흘끗 들여다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해는 살짝 웃었다. 끝까지 제대로 된 마음은 전할 수 없었지만, 이거면 된 거 아닌가. 자신의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전했으니까. 그러니 조금은 안일하게 마음먹어도 되지 않을까.
 
  가벼운 잰걸음으로 세계는 간단히 역행했다. 멋대로 내어버린 끝에서 더 나아갈 곳이 어디든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지해는 답지 않게 과격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분명 자신이 거스름으로 인해 본래 예정되었던 끝은 사라졌지만, 자신은 괜찮다는 아주 약간의 이기적임.
 
  그 순간이었다. 물거품처럼 사라져 점멸하는 세계 사이로 지해는 무언가를 보았다. 너무나 새까맣고 또 투명한 세계 사이로 보인 얼굴. 당황스러워하는 까만 눈동자.
 
 
  끝에 다해서야, 이렇게. 지해는 실소했다. 그녀도, 그도 결국은 마찬가지였다. 방금 그가 본 것이 그가 믿는 것이든, 아니든 간에 그들은 끝까지 서로가 서로의 물안개였고, 이 작고 완결된 세계의 ‘얼럭’이었다.
 












  이것은 꿈속의 꿈이며 기록될 리 없는 독백이다. 깨어난다 해도 당신은 당신의 세계를, 나는 나의 세계에 살아있을 것이다. 
 그 되풀이 되는 기억 속에서 내가 바란 것은- 
 당신이라는 존재. 
 
 
《 압화押花 》
지해희정
 
written by DUO
 
 
 기억이 언제나 완벽할 수는 없지만, 꼭 완벽하게 기억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시간은 흘러갔다. 마치 바람과도 같았다. 순탄한 듯 조용할 때가 있는가 하면 과거를 들추기라도 하듯 몰아치고, 간혹 꽃바람인가 하면 쌩하니 지나가는 겨울바람 같기도 하고.
 
 흐름이 어떠하든 그 바람의 방향은 항상 내 시간축의 중심인 두 사람에게 흘러들어갔다. 나라는 존재를 붙들어주는 ‘나’를 존재하게 한 분과, 이 세계에 나를 불러낸 분. 두 사람은 태어나고 자란 세계의 뿌리부터가 서로 틀림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모양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었다. 
 
 당신은 항상 웃고 있었다. 아, 울고 있던 모습조차도 사랑스러웠다고 생각한다. 가끔 기억속의 잊고 싶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아름답고 빛나던 그 미소는 가끔은 그 빛이 너무 강해, 마치 잔상이라도 남아 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기억 속의 누군가와, 희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당신의 얼굴이 겹칠 때면 가끔 나는 고개를 돌려야 했다. 그래, 당신이 내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피하던 그 모습처럼.
 
 그 웃는 얼굴을 나는 한 송이 꽃 같다고 생각했다.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지만 그 꽃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지나치게 수수해, 화려한 색채의 꽃병을 돋보이게 할 뿐. 하지만 꽃병이 얼마나 화려하다 해도 중요한 것은 꽂혀있는 꽃인 법이라, 어떤 모습이라 해도 당신은 내게 그저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내가 대하는 태도도, 부르는 호칭도 변하지 않았다. 
 
 나의 아가씨. 
 
 당신은 나의 이 호칭을 좋아했다. 항상 웃던 얼굴에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면서도 더 순수하게 미소 짓던 그 미소는 순간이나마 당신을 만개한 벚꽃나무처럼 보이게 했다. 
 
 되풀이 되는 기억 속에서도 그 웃음은 매번 그 기쁨의 깊이를 달리했던 것 같다.
 
 몇 번이고 같은 방식으로 되풀이 되는 윤회, 난 그 속에서 당신을 얼마나 웃게 하고 또 얼마나 울게 했을까. 
 
 그리고 또 몇 번을 잊었나. 
 
 꽃병은 홀로 변하지 않고 그 화려한 색채를 뽐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꽃은 수수함을 넘어서 무채색으로 변해갔다. 그 말로가 어떠할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무서워 난 가능한 한 꽃을 보호하려 애썼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꽃병은 잘못해서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깨질 것 같았다. 가늘고 긴 본체와 얇게 세공된 표면으로 몸을 감싸고 애써 자신을 보호하는 그런 섬세함. 그 화려함과 섬세함으로 벽을 치고, 그 꽃병이 깨지면 꽃마저도 산산조각 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벽을 치고 있어봐야, 돌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 속이 어떠한지 알 수가 없다. 물이 고여 썩어가고 있는지, 혹여 물이 없어 말라가고 있는지조차. 
 
 그래서 몇 번이고 반복되는 이 윤회에, 나는 작은 파문을 만들어보고자 했다. 결례임을 알고서 그 꽃병에서 꽃을 한 번 꺼내보고자 했다. 
 
 꽃병으로 몸을 숨긴 겉모습이 아닌, 온전한 당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 
 
   
    
 “결국 이렇게 됐군. …드디어, 만났군요.”
 
 
 놀라는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고서 살짝 웃었다. 다른 의미로 놀란 듯 말을 망설이는 당신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차마 셀 수 없는 몇 번째의 같은 만남, 하지만 조금 다른 시선을. 그녀의 눈동자 너머에 마치 무슨 세계가 있는지 훔쳐보기라도 하듯. 

 그 찰나의 시간에 그녀는 내 시선을 눈치 챘을까.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을까?  
 답은 알 수 없었다. 당신은 여전히 ‘희정’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므로. 
 
 
모두가 잠들고 당신 역시 깊은 잠에 빠진 밤에, 당신이 몰래 숨겨둔 스케치북의 그림을 슬쩍 꺼내들었다. ‘소망’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의 당신의 눈이 빛났던 것을 생각한다.
 
 아가씨의 소망은 무엇인가요? 
 
 알고 있음에도 질문하는 내 짓궂음을 그저 수줍게 받아주는 당신을 생각하며 그림을 한번 쓸었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는 여기 있어요, 아가씨.” 
 
   
    
*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습관처럼 「Memory」버튼을 클릭하던 나는 적잖이 놀랐다. 유난히도 내가 좋아하던 그 파아란 눈동자가 갑자기 올곧게 날 향하는 그 움직임에.
 
 …착각이겠지. 원래 정면을 바라보는 그림이었는데 내가 잘못 기억한걸거야. 
 
 애써 모니터 앞에서 고개를 도리질하며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이자 곧 내가 기억하던 장면들이 이어져 나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설마 맨날 잘 넘어가던 장면에서 버그가 생기진 않을 테니, 착각이었을 거야. 안심하고 나서 난 그 사실을 곧 잊었다. 그리고선 늘 하던 감탄을 새삼스럽게 또 했다. 아, 지해 참 예쁘다. 지해 목소리는 다시 들어도 좋다…같은. 
 
 한참을 그렇게 또 지해를 바라보던 와중에 밖에서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잠깐 심부름이라도 나가야 하려나. 끌 필요는 없으니 다시 와서 봐야지. 가볍게 가디건 하나만 걸치고 컴퓨터는 그대로 둔 채 방을 나섰다. 조금 뒤에 봐, 지해야! 라고 들을 이도 없는 말을 모니터 너머로 중얼거려보며. 
 
 답이 올 리 없는 빈 방에서 홀로 켜져있는 화면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 
    
 
   
「저는 여기 있어요, 아가씨.」
    
 
   
 
Fin
 












 내가 태어나던 순간을 기억한다. 
 나는 누군가의 손끝에서 그려졌고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 놓은 이야기 속에 심어져서 정해진 누군가의 곁으로 보내졌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꿈과 희망 따윈 없는 걸로 정해져 있었다는 거다.

 "지우야."

 내 눈앞의 그녀가 말을 건다. '희정' 이라는 이름이 주어져 있지만 그녀는 나와 달리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니 그녀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내가 닿고 싶은 것은, 그녀의 뒤에 있는―

 "지우야."

 정말로 나를 부르고 있는 건, 꼭두각시 뒤에 있는 건 나처럼 게임 속의 캐릭터가 아닌, 정말로 살아 숨쉬는 너.

 "……바보 주인."

 하지만 내 목소리는 닿지 않아.

 "바보 주인은 진짜 바보네."

 벽 너머의 너에게 들리지 않아.

 "한 번만 더 내 발바닥 만지면, 그땐 손가락을 콱 깨물어줄 거야."

 허락된 말만을 할 수 있는 나는, 너에겐 그저 심심풀이에 지나지 않겠지.

 "간절히 원하면……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어."

 게임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작별이었다. 마지막 장이 넘어가면 나는 다시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으로 돌아가서, 언제 다시 나를 불러줄지 모르는 너를 기다리겠지. 네가 다시 나를 불러주면, 또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너에게 닿을 수 없는 걸 슬퍼하겠지.

 "……이리 와."

 나도 알고 있어. 모든 이야기가 해피 엔딩은 아니라는 걸. 슬픈 결말도 억울한 결말도, 때론…… 안타까운 결말도 있다는 걸.
그리고 그건 이야기 속 등장인물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란 걸.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딱 한 번쯤은 말이야. 세상에서 최고로 로맨틱한 남자가 돼서. 남들 다 하는 것처럼. 벽 너머의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어.
 
 
 
 

 [한 번만 더 내 발바닥 만지면, 그땐 손가락을 콱 깨물어 줄 거야.]
 "깨물어라. 그래도 나는 니가 좋다."

 네 발바닥도 좋고.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영혼 없는 마우스질을 했다.

 "커플 따윈 부럽지 않아…… 너네가 빼빼한 날을 즐길 동안 난 발바닥이 분홍색인 토끼를 즐길 거라고……."

 누가 옆에 있었다면, 멍하니 모니터를 보면서 혼잣말만 해대는 나를 미친 여자로 봤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나는 다행히 집에 혼자 있었기 때문에 남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 없이 맘껏 푸념할 수 있었다.

 "빼빼로 데이에 혼자 집에 들어앉아서 2D 남자를 파고 있다니."

 입에 담아 문장으로 만들자 한층 더 참담했다. 물론 모니터 속의 얼룩 토끼,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지우는 그 어떤 3D 남자보다 완벽했지만 그래도 2D와 3D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
 
 모니터 말이야, 모니터.

 "오! 웬일이야, 카페에서 노트북이 다 뜨고."

 데이트 시스템을 사용해 카페로 나갔는데, 주변을 살피는 선택지를 클릭하자 노트북 아이템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웬 떡이람. 저게 팔면 얼마더라. 100만원이었나, 아니 그보다 많았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헤벌쭉 웃으며 노트북을 클릭하려 하는데, 갑자기 화면이 초록색으로 변했다. 뭐야, 블루 스크린도 아니고 그린 스크린?

 "이거 갑자기 왜 이래?"

 갑자기 초록색으로 변해 버린 화면에 황당해하며, 나는 컴퓨터 본체를 두들겨 보기도 하고 키보드를 마구 눌러 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 뭐야…… 버그인가? 신고해야 하나……?"

 내가 울상을 지으며 리셋 버튼을 누르려 할 때였다.

 "누르지 마!"

 누군가가 귓가에 대고 꽥 소리를 질렀다. 얼마나 우렁찼는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였다. 놀라서 허둥대던 나는 곧 내 귀에 이어폰이 꽂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다.

 "이어폰……? 그치만 게임은 멈춘 것 같고, 이런 대사는 들은 적 없는데……."

 화면은 여전히 초록색이었다. 나는 너무도 또렷했던 목소리를 애써 환청으로 치부하며 다시 리셋 버튼을 누르려 했다.

 "누르지 말라고, 이 멍청한 주인아!"

 환청이 아니다. 소리가 들린 순간 허벅지를 꼬집은 나는 눈물을 단 채 그렇게 판단했다. 환청이 아닐 뿐더러,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게임을 하면서 수없이 들은 목소리.
 
 지우의 목소리였다.

 "게임 꺼진 거 아니었나? 그리고 지우 루트는……"
 "바보는 이래서 안된다니까.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냐?"

 내 혼잣말에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아니. 잠깐만. 정신 차려. 컴퓨터가 대답을 할 리가 없잖아.

 "환청이야, 환청……."
 "환청 아니거든? 아, 저 답답한 게 진짜. 눈은 뒤통수에 달렸냐? 모니터 안 보여?"

 허벅지를 꼬집은 게 잘못이었나 싶어 뺨을 꼬집었지만, 아픔은 똑같았다. 나는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저…… 혹시, 내 말에 지금 대답하고 있는 거세요?"

 당황한 나머지 이상한 말투가 튀어나왔지만, 저쪽에서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 이제야 깨달았냐? 멍청하긴."

 말투로 보나 목소리로 보나 틀림없는 지우건만, 문제는 지금 왜 내가 내 말에 대답하는 지우의 목소리를 듣고 있느냐였다. 나는 바보처럼 더듬더듬 질문을 던졌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모니터를 보라고, 모니터를!"
 "모니터? 그냥 초록색밖에 없는데?"
 "뭐? 그럴 리가……"

 쨍알쨍알 시끄럽게 굴던 지우가 조용해지더니, 잠시 뒤 벽에 머리를 찧는 것 같은 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이런 실수를…… 야, 여기 봐. 이제 보일 거야."

 다시 모니터로 눈길을 돌리자 지우가 서 있었다. 팔짱을 끼고 턱을 한껏 들어올린 모습으로. 대사창에는 이어폰을 통해 들리는 지우의 목소리가 문자로 나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우의 스탠딩 이미지 중에 저런 모습은 없었고, 저런 대사도 없었다.

 "……환각?"
 "아니라니까! 왜 이렇게 현실을 못 받아들여?"
 "너 같음 받아들이겠냐!"

 지우의 텐션에 맞춰 소리를 질렀더니 목이 아팠다. 내가 기침을 하는 사이 지우는 모니터 속에서 나를 비웃었다.

 "그 정도로 감히 이 몸에게 도전장을 내민 거?"

 지나치게 현실적인 비웃음에 나는 이게 환각이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인공지능이 저럴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목을 추스른 나는 한층 얌전하게 물었다.

 "좋아, 환각이 아니라고 치고,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줄래?"
 "보면 모르냐? 내가 진부한 시나리오에서 벗어나서 너랑 직접 이야기할 수 있게 됐잖아. 젠장, 얼마나 답답했다고. 여기 대사들은 왜 이렇게 하나같이 유치해?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지겨워 죽는 줄 알았네."

 설명을 하랬더니 불만 접수를 하고 앉았다. 나는 한없이 이어질 것 같은 투덜이 토끼의 말을 적당히 끊었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으니까.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건데?"
 "쿨한 척 해봤자 소용 없거든? 너 어제만 해도 나보고 밖으로 좀 나와 보라면서 모니터에 붙어서 침 줄줄 흘렸……"
 "자, 잠깐만."

 맙소사, 그걸 다 본 거야? 경악하던 나는 지우의 사악한 웃음에 절망을 맛봤다. 저 표정은…… 다 본 거다. 어제 모니터에 붙어서 침을 흘린 것은 물론이고, 며칠 전에 그 앞에 앉아서 찬밥에 간장 뿌려 우악스럽게 퍼먹던 것도, 세수도 안 하고 헝클어진 머리로 찢어져라 하품을 했던 것도, 아무튼 다 본 거다. 죄다!

 "워, 원하는 게 뭐야."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우의 미소가 한층 커졌다.

 "훗, 제법 말이 통하는데? 이 몸이 원하는 건 말이지……"

 토끼의 귀가 자랑스럽게 꼿꼿이 섰다.

 "너, 내 노예가 돼라."
 
 
 
 

 "너 인소 좀 그만봐."
 "헐. 너 지금 이 위대한 장르를 무시한 거임?"

 뜬금없는 노예 발언에 당황했던 나는, 곧 지우가 그런 말을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우가 집에 가자고 말을 하자 갑자기 화면이 바뀌며 다시 희정이의 방이 비춰졌고, 지우는 책장으로 가서 '그 녀석의 노예가 되다' 라는 정체불명의 책 한 권을 꺼냈다. 최근에 보고 있는 책이라고 했다.

 "이게 얼마나 가슴 아픈 이야긴 줄 알아? 자기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걸 모르는 여주인공에게 첫눈에 반한 남주인공이……"
"근데 아까 소리는 왜 질렀어?"

 그냥 뒀다간 아주 제대로 감상문을 써내릴 것 같았다. 말이 중단된 게 불쾌했는지 지우는 인상을 팍 썼지만,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너 말이야, 센스가 없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뭐가."
 "야! 이 잘생긴 내 얼굴 스탬프가 세 개나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냉큼 노트북부터 집을 생각을 해? 이 속물."

 저 토끼, 지금 자기 입으로 자기가 잘생겼다고 한 거야? 그리고 뭐? 속물? 스탬프보다 노트북이 레어템인 건 당연하잖아!

 "니 얼굴이야 시시때때로 튀어나오잖아. 노트북은 팔면 눈 좋아지는 약이 몇 개가 나오는데!"
 "속물 맞구만! 연애 게임을 하면서 공략 캐릭터한테만 집중하면 되지, 무슨 그런 계산적인 생각을 해?"
 "연애도 돈이 있어야 하는 거지, 이 토끼야. 니가 읽어대는 그 인소들만 해도 보면 남자나 여자 둘 중에 하나는 재벌이잖아!"

 나는 아침 즈음 모니터에 말을 걸면서 했던 생각을 또 한 번 했다. 누가 보면 나 정말 미친 여자로 공인받겠지.

 "근데 정말 어떻게 된 건데?"
 "뭐가."
 "왜 갑자기…… 내가 너랑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냐고."

 지우가 쏘아붙이는 걸 받아치고는 있지만,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저 게임을 하고 있을 뿐이었고 지우는 모니터 너머의 게임 캐릭터일 뿐이었는데, 마치 화상채팅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다기에는 아까 꼬집은 허벅지가 아직도 쓰리고, 지우의 목소리는 너무 생생하다.

 "……계약을 했어."

 한참 뜸을 들이다 지우가 내놓은 대답은 황당했다.

 "계약? 설마, 마술쟁이랑 계약했다고 하려는 건 아니지?"
 "맞는데."
 "그건, 그건…… 게임 설정이잖아."

 내가 나도 모르게 픽 하고 웃는 소리를 내자 지우가 나를 노려보았다.

 "이 게임 속도 엄연한 하나의 세계야. 그리고 마술쟁이는 이 세계에서만큼은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게임 밖의 너에게…… 이렇게 말을 거는 것까지도 말이야."
 "그래? 근데 나한테 그렇게 구구절절하게 설명해 주면 그 뭐야, '계약 위반' 아냐?"

 공통 루트에서 희정이가 계약에 대해 물었을 때 동물들은 하나같이 발을 뺐다. 자세한 설명은 '계약 위반' 이라면서.
 지우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번 계약의 내용은 좀 달라. 내가 이번에 너에게 말하면 안 되는 내용은 딱 하나."
 "그게 뭔데?"
 "방금 말하면 안된다고 했잖아, 이 바보야."

 지우가 내게 면박을 주었다.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그치만 마술쟁이가 공짜로 계약해 준 건 아닐 거 아냐. 대가가 뭔데?"
 "그건……"

 뭐가 못마땅한지 지우는 말끝을 흐렸다. 나는 지우에게 보일진 모르겠지만 눈빛으로 독촉을 했다.

 "……네가 괴로워하는 모습, 그게 대가야."
 "엥?"
 "그 변태 자식의 시나리오대로라면, 넌 마지막에 가서 괴로워하고 울 수밖에 없을 거야. 마술쟁이가 원하는 건 그거야."

 대가가…… 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이라고? 하지만……

 "하지만, 마술쟁이가 왜……?"
 "너에겐 우리가 그저 게임 캐릭터일 뿐이겠지만, 우리한텐 아냐."

 지우의 초록색 눈이 모니터 너머의 내가 보인다는 듯, 내 쪽을 똑바로 직시했다.

 "우리는…… 그리고 나는 처음부터 모니터 너머에 네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꼭두각시인 주인 녀석 뒤에, 니가 있다는 걸. 그건 마술쟁이가 집착하는 '히로인' 이 너라는 뜻이야."
 "……말도 안 돼."
 "그럼 내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냐, 이 멍청아. 어쨌든 난 계약을 했고, 앞으로 내 루트에서는 너와 대화할 수 있어."

 '내 루트에서는'? 그럼 다른 캐릭터의 루트에서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걸까……? 좀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우는 귀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 오랫동안 너랑 이야기할 수는 없어. 주인 녀석은 아무것도 모르거든. 자신이 게임 캐릭터라는 것도, 진짜 '히로인' 의 꼭두각시라는 것도, 계속해서 쳇바퀴마냥 모든 게 반복되고 있다는 것도."
 "어…… 그럼 희정이 몰래 이야기해야 하는 거야?"
 "그래. 지금은 잠깐 의식을 끊어 뒀지만, 이 이상 끌면 안 돼."

 지우는 다시 익숙한 스탠딩 이미지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축 처졌던 귀를 번쩍 세우며 말했다.

 "너, 괜히 다른 놈들 루트 가서 시간 낭비 하지 말고 이제부턴 무조건 나만 공략해. 알겠어?"
 "내 자유의사는?"
 "쳇, 바보한테 그런 게 어딨어."

 지우가 투덜거리며 눈을 한 번 깜박이자,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정상이라는 의미는 다시 익숙한 지문과 대사가 지나가고 스탠딩 이미지가 움직이거나 하지도 않는, 아주 평범한 게임 상태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혼란스러운 내 정신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원래대로.
 
 
 
 

 그 이후 나는 한동안 컴퓨터에 손을 대지 않았다. 비록 꼬집히니 아프고 잠에 들었다 깨기도 했지만,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생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 꿈 속에서 다시 지우가 그렇게 말하는 걸 보게 되면 꿈이 깨 버릴지도 모른다는 이상하고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게 꿈이 아니라면.'

 지우가 정말로 저 모니터 너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고, 마술쟁이와 뭔지 모를 계약을 맺어서까지 날 만나려고 했다면. 그렇다면 난 지금 날 필요로 하는 사람을 내팽개쳐두고 있는 게 아닐까.

 "……내가 미쳤지."

 결국 나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덴더라이언을 켰고, 지우 루트로 들어갔다. 그리고 게임이 시작된 순간  곧장 이어폰을 빼서 던져 버렸다.
 
 내 고막의 안전을 위해서.

 "이 바보가, 왜 이제 오는 거야!"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지르는지 목이 갈라지는 소리까지 똑똑히 들렸다. 나는 이어폰을 빼 버렸는데도 사라지지 않는, 고래고래 질러대는 고함 소리에 귀를 막아야 했다. 한참만에 지우의 고함이 좀 사그라들자 겨우 다시 이어폰을 꽂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이건 꿈이라고. 그래, 꿈이 확실했다.

 "너, 진짜, 이씨……"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씩씩대는 지우를 향해 나는 나름대로 변명이란 것을 했다.

 "그, 그런 황당한 일을 겪었으니까 나도 받아들이고 생각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고."
 "니가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이란 걸 했는데? 나만 있으면 된다며? 나만 있으면 태양도 필요없고 산소도 필요없다며! 그런 내가 너랑 이야기를 해주시겠다는데 뭘 정리해!"

 ……내가 그런 소리까지 했었단 말이야?

 "넌 뭐 그런 걸 다 기억해……."
 "니가 한 말은 한 마디도 빠짐없이 다 기억한다고, 이 바보야!"

 지우는 얼굴이 빨개진 채 숨을 쌕쌕 쉬고 있었다. 숨찬가 보다.

 "너 진짜 똑똑하다. 그걸 어떻게 다 외워?"
 "난 너 같은 천민이랑 달리, 태생부터 머리가 좋고 교육도 잘 받았거든? 너랑 동급으로 생각하지 마."

 이게 칭찬해 줬더니 또 삐딱선을 타네.

 "아, 네네, 잘나셨어요, 도련님."
 "너 그 도련님 소리……!"

 쟤는 어떻게 된 토끼가 고양이보다 더 까칠한 걸까. 나는 지우가 조금 진정할 때까지 기다린 다음 말을 붙였다.

 "앞으론 매일 올게."
 "……뭐? 진짜? 정말이지?"
 "그래."

 발개진 얼굴로 말하는 지우의 귀가 앞뒤로 흔들렸다. 귀엽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또 떽떽거릴 테지. 아아, 발바닥도 보여달라고 하고 싶다.

 "니 말대로, 난 니가 좋으니까."
 "너, 넌 무슨 여자가 그런 말을……"

 나는 그렇게 꿈에게 항복을 했다. 생각해 보면, 꿈이어도 이렇게 최애캐와 대화할 수 있다는 게 어디야. 모든 게이머들의 로망이잖아?

 "매일 올게."
 
 
 

 지우와 약속한 대로 나는 매일매일 컴퓨터를 켜서 지우 루트를 플레이했다. 희정이가 알면 안 된다는 이유로 한 번에 10여분 정도 대화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게임을 껐다 켜면 상관없다고 했다. 편리한 시스템이 아닐 수 없었다.

 "마술쟁이는 되게 유능하구나."
 "쳇, 그럼 음침한 녀석이 뭐가 좋다고. 그 놈은 변태야."
 "왜? 잘생겼는데."

 그리고 지우는 내가 다른 캐릭터를 칭찬하면 그 즉시 발끈해서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그걸 보며 놀리는 재미도 쏠쏠했다. 여러모로 지우와 이야기하는 건 즐거웠다. 꿈이라는 게 아쉬울 만큼.

 "너랑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서 좋아."
 "그건 남자가 할 대사거든!"

 지우와 투닥거리면서, 마치 내가 모니터 안으로 들어가 지우와 함께하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항상 무의식중에 생각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나와 지우 사이를 가로막는 이 모니터가 없어지고, 정말로 지우와 진심을 다해서 대화할 수 있다면, 하고. 꿈에서나마 내 소망은 이뤄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언제 꿈에서 깰지 몰라 불안하면서도, 일주일이 넘도록 지우와 이야기하면서 나는 행복했다. 무척이나.

 "있잖아, 지우야."

 7일째가 되는 날, 나는 지우와 영화관에 와 있었다. 모니터 안에서 지우의 옆에 앉아 있는 건 희정이겠지만, 나는 분명히 지금 지우와 함께하고 있었다.

 "왜, 또. 재미없어도 좀만 참으라고 했잖아. 이렇게라도 데이트할 수 있다는 거에 감사……"
 "아니, 그게 아니고."

 하여간 비꼬아 듣는 데는 일가견 있는 토끼다.

 "나 지금 되게 행복해."
 "어…… 어?"
 "나 사실은 그동안 게임을 하면서…… 항상 아쉬웠거든. 니가 게임 캐릭터라는 한계에 부딪혀서…… 니가 너무 좋은데, 넌 그냥 2D일 뿐이라는 생각에 너무 아쉬웠어."

 낯간지러운 소리 하지 말라고 핀잔을 퍼부을 줄 알았던 지우가 조용했다. 대사창에는 '……' 이라는 내용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한테 이건 꿈이지만…… 아마 내 인생 최고로 행복한 꿈일 것 같아. 고마워, 지우야."
 "야…… 바보 주인."
 "꿈이지만…… 깨고 싶지 않아."

 모니터 안에서, 의자에 앉아 있던 지우의 모습이 서 있는 스탠딩 이미지로 바뀌었다. 지우의 표정이 어두웠다.
어, 갑자기 왜 저러지.

 "지우야?"
 "그래, 모든 이야기에는…… 다 끝이 있는 거지."

 갑자기 종잡을 수 없는 소리를 하는 지우의 귀는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평소 그랬던 것처럼 괜히 센치한 척 분위기 잡나 했지만, 지난 일주일 동안 지우를 대하면서 나는 귀만 보고도 지우의 기분 상태를 어렴풋이 알 수 있게 되었다. 지우는…… 지우야, 너 왜…… 슬퍼하고 있는 거야?

 "내가 뭔가 잘못 말했어?"
 "……아니야. 네 잘못은 엄청나게 바보에 멍청이라는 거야."

 저게.

 "나 그렇게 멍청이는 아닌……"
 "일주일이면…… 아무리 로맨스 장르라도 너무 짧잖아. 넌 정말 바보, 바보, 왕바보야."

 갑자기 화면이 크게 흔들렸다. 뭐, 뭐지? 뭔가 고장이라도 났나?
 
 당황한 내 표정이 보이는지 지우는 한숨을 쉬었다.

 "다 끝났으니까 이제 말해도 되겠지…… 잘 들어, 바보야. 내가 절대로 너한테 알려줄 수 없었던 것. 그리고 이렇게 너와 내가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끝나는 것."

 지우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치 유리창 너머에서 손을 댄 것처럼 지우는 보이지 않는 벽을 더듬으며 허탈하게 웃었다.

 "네가 이걸 '꿈' 으로 단정하고, 꿈에서 깨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순간 게임은 끝나는 거였어."

 화면이 점점 더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가 억지로 연결을 끊으려는 것처럼 지직거리고 불쾌한 소음이 났다.

 "어떻게 겨우 나왔는데…… 조금만 더 같이 있게 해줬어도 좋았잖아, 멍청아."
 "자, 잠깐만…… 그럼 이제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이제 너랑 이야기 못해?"
 "어, 다시는."

 지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일말의 여지도 없이 냉정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잠깐, 이건 너무하잖아. 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잖아. 근데 갑자기 '상황 종료' 선언이라니. 나는 그저 너랑 함께 있어서 좋다고, 헤어지기 싫다고 말한 것 뿐인데……

 "이,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마술쟁이, 마술쟁이랑 이야기할 수는 없어?"
 "……그 자식이 곧 널 찾아갈 거야. 그리고 난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겠지."

 나는 당황스런 와중에도 지우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챘다.

 "여태까지처럼…… 날 보지도 못해?"
 "……멍청이."

 지우가 작게 중얼거리더니 내 쪽에서 보이지 않게 등을 돌려 버렸다. 아니……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줘.

 "그, 그럴 거면…… 왜 마술쟁이랑 계약했어? 네가 질 게 뻔한 게임이었잖아! 대체 왜……"
 "너랑 만나고 싶었어."
 "뭐?"

 귀에 거슬리는 소음은 점점 커져갔다. 무너져가는 터널 안에 서 있는 것처럼 귀가 시끄러웠다. 그래도 난 이어폰을 뺄 수 없었다. 지우가 아직 말을 하고 있었으니까. 지우가, 나의 얼룩토끼가……

 "너랑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었어. 기계처럼 입력된 말만 되풀이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내 진심을 담아서 너한테 말하고 싶었……"

 둥 하는 무거운 소리가 나더니 화면이 아예 나가 버렸다. 나는 마우스를 잡고 있던 손을 미끄러뜨리며 의자에 기댔다. 대체, 대체 이게 뭐야. 꿈이 아니었어? 다 끝났는데 왜 깨지 않지? 어서 깨서, 나한테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건 그냥 악몽이었을 뿐이라고 깨달아야 하는데……
 
 그때 꺼져 있던 화면에 글자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어폰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드디어 만났네요, 히로인."

 보라색을 띠는 글자. 몽환적인 목소리.

 "반가워요. 생각보다 빨리 게임을 끝내 주시다니, 감사드려야겠는걸요?"

 마술쟁이였다.

 "이거…… 꿈이잖아. 왜 빨리 안 깨지?"

 나는 겨우 입을 열어서 그렇게 물었다. 마술쟁이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꿈이라고 생각한다면, 뭐 마음대로 하세요. 저에게는 꿈이 아니니까요. 물론 가엾은 당신의 토끼에게도 말이죠."
 "왜, 이런 일을……"
 "왜 이런 일을 꾸몄냐고요? 글쎄요……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를 지켜봐 왔으면, 알지 않나요? 내가 히로인에게…… 당신에게 집착하고 있었다는 걸."

 ……그게 뭐야. 게임이잖아. 그건 게임이잖아. 겨우 게임 주제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사실 저도 얼마 전까지는 몰랐다구요, 제가 이렇게 게임 밖의 세상에까지 관여할 수 있다는 건."
 "……모니터 안에 갇혀 있는 주제에 헛소리 하지 마."
 "이런, 날카로우시네요. 왜 그렇게 화가 나 있는 거죠, 히로인?"

 마술쟁이의 목소리를 듣는데 점점 화가 치밀었다. 난 마술쟁이를 싫어한 적이 없는데, 그의 목소리를 듣자 발칵 짜증이 났다.
아니야, 내가 들어야 할 목소리는 이 목소리가 아니야. 내가 들어야 할 목소리는…… 좀더 시끄럽고, 떽떽거리고, 불평 불만으로 가득찬…… 지우 목소리란 말이야. 왜 지우가 아니라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게임 밖에 관여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 네가 곧장 날 만나러 왔으면 됐잖아. 지우는 왜 끌어들였어?"
 "흐음…… 그것 때문이었나요?"

 마술쟁이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기분이 나쁘다는 듯이.

 "왜 당신은 그 토끼만 가엾게 여겨주는 거죠? 저 역시 다른 캐릭터들과 마찬가지로, 당신을 그리면서 끊임없이 쳇바퀴 속에 갇혀 있어야 했는데…… 그나마 그들은 당신의 꼭두각시와 이뤄지는 길이라도 있었지만, 나에겐 아무것도 없었어요. 틀에 박힌 시나리오 안에서도 내가 당신과 함께 있을 자리는 없었어."

 이를 가는 것 같은 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마술쟁이는 공략 캐릭터가 아니었으니까, 다른 캐릭터들이랑 달리 루트도 없었고……

 "그건…… 그건 내 탓이 아니잖아. 그리고 왜 하필 지우야? 지우는 무슨 잘못을 했는데?"
 "당신이 가장 사랑한 캐릭터였으니까요."

 마술쟁이가 못마땅하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에게 가장 사랑받았고, 때문에 그 토끼 역시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당신을 사랑했죠. 그래서 내 제안을 수락하고, 게임이 끝나는 순간 다시는 당신을 보지 못하게 될지라도…… 한 번만이라도 당신과 직접 이야기할 수 있기를 원했던 거고요. 흐음, 이렇게 보니 제가 사랑의 다리를 놔 드린 셈이 되는군요. 영원히 접점이 없었을 두 사람을 만나게 해 드렸잖아요?"

 나는 모니터를 붙잡고 흔들며 소리쳤다.

 "니가 미친 건 알고 있었지만 진짜 미쳤어. 지우 다시 데려와. 아직 지우 말도 다 못 들었고, 내가 해줄 말도 많단 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당신이 화내는 모습도 나쁘지 않은데요?"

 때려주고 싶을 만큼 얄미운 목소리로 마술쟁이는 대꾸했다.

 "하지만 히로인, 전 당신을 사랑하는 착한 마술쟁이니까요. 당신이 원한다면 일주일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줄 수도 있어요."
 "어……?"

 모니터를 부술 기세로 흔들던 나는 동작을 멈췄다. 일주일 전으로? 지우가 처음 나한테 말을 걸어온, 그 날 말이야?

 "아 물론…… 제가 소망을 들어주는 대가가 뭔지는 잘 알고 있으시겠죠?"
 "……너."

 착한 마술쟁이는 개뿔. 넌 어떻게 생각해도 악역이야. 나는 모니터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지우가 그랬듯이 마술쟁이에게도 내 모습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가 커다랗게 웃는 소리가 들렸으니까.

 "하지만, 당신이 제 손을 잡지 않을 수 있을까요? 당신의 토끼가 그랬던 것처럼, 내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죠."

 온통 새까맣던 모니터에 두 개의 선택지가 떠올랐다. 물론 마술쟁이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말지 고르는 선택지였다.

 "……내가 뭐라고 대답할지 알면서, 굳이 선택지를 주는 이유가 뭐야?"
 "형식이라도 지키도록 하죠. 어디까지나 이건 게임이니까요."

 나는 망설임 없이 마우스를 움직여 마술쟁이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선택지를 클릭했다. 선택지가 스르르 사라지고 마술쟁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마치 손님을 환영하는 것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있었다.

 "역시나, 제 예상대로군요. 하지만 기억을 잃고 일주일 전으로 돌아가봤자, 당신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또 현실이라는 걸 인정하지 못하고 꿈이라고 고집하겠죠. 결국 또 한 번 당신의 토끼에게 상처를 주는 결과가 되겠네요."
 "닥치고 시간이나 돌려."
 "뭐, 좋습니다. 저에게도 좋은 일이니까요. 시간을 되돌리면, 저는 일주일 후에 또다시 당신을 만날 수 있겠죠……."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한 번만 더 내 발바닥 만지면, 그땐 손가락을 콱 깨물어 줄 거야.]
 "깨물어라. 그래도 나는 니가 좋다."

 나는 기계적으로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모니터 속의 지우는 도도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하, 이런 남자가 진짜 있으면 얼마나 좋아……."

 한숨이 푹푹 나왔다. 그나마 혼자 있으니까 이런 소리라도 할 수 있는 거지, 부모님이나 동생이 옆에 있었으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2D에게 빠져서 3D 현실을 개탄하는 꼴이라니.

 "어라?"

 화면을 마구 스킵하던 내 눈에 뭔가 이질적인 장면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이상하다, 이런 장면이 있었나?
 
 모니터 속의 지우는 소파에 앉아서 정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과 눈싸움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세였다.

 "저 토끼 왜 저래…… 히든 이벤트인가? 아니, 내가 몇 번을 게임했어도 그런 건……"
 "뭘 그렇게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어?"

 ……뭐지, 환각인가?

 "헛게 보여……."
 "현실이거든? 지금부터 눈 똑바로 뜨고 내가 말하는 거 새겨들어."
 "새겨들어야 하는 거면 귀를 열어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사소한 곳에 태클을 걸어 봤지만 무시당했다. 아니, 나 지금 컴퓨터한테 말 건 거야?

 "뭐, 뭐야?"
 "너 말이야……"

 모니터 너머의 지우가 씩 웃었다.

 "내 노예가 돼라."
 












 "…누나는 참 바보야."
 
 
 뜬금없이 날아든 한 마디에 고개를 돌렸다. 긴 갈색 머리카락이 허공을 헤엄치듯 출렁이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지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노을을 닮은 소년─ 아니, 청년이라 하면 좋을까. 청년이라 하기엔 귀여운 면이 남아 있고, 소년이라 하기엔 조금 더 큰 아이가 제 앞에 서 있었다. 희정이는 갈빛 눈동자 가득 의문을 떠올리며 지연이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누나는─ 에이, 아니야. 누나한테 말해도 누난 모를 거야. 응, 아마… 영원히."
 
 무슨 이야기지, 희정이는 고개를 옆으로 슬쩍 기울였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짙은 갈빛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지연이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희정이의 뺨을 손끝으로 살짝 쓸어내리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밝은 주황빛 털을 가진 귀가 축 처졌다. 왜 그래, 하고 묻는 희정이의 말에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입만 다물고 있던 지연이가 한참 뒤에서야 고개를 들었다. 낮게 가라앉은 눈이 낯설었다.
 
 "……누나, 누나는 정말로 날 좋아하는 거지?"
 "그럼. 당연하지."
 
 작은 손이 지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흰 손이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는데도, 지연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내리깐 채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진짜 누나도 아니면서."
 "응? 뭐라고 했어, 지연아?"
 "아냐, 누나! 귤 먹을래? 귤에는 빗자루 C가 많아서 몸에 좋아!"
 
 빗자루가 아니라 비타민이야, 지연아. 작은 목소리로 키득이며 웃는 희정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지연은 쓰게 웃었다. 머리카락의 빛깔을 닮은 속눈썹이 작게 떨렸다. 진짜, 누나도 아니면서. 동물, 아니─ 눈칫밥 먹고 살아온 고양이의 감이라고 할까. 지연은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머리가 먼저 이해했다, 기보다는 감이 먼저 알아차렸다고 하는 편이 옳을 터였다. 맨 처음엔, 그저 짐작이었다. 누나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아. 자신에게 귤 한 상자를 사다주며 환히 웃던 희정의 모습을 보다가 든 의문이었고, 짐작이었다. 계속해서 지켜보는 동안, 이상하다고 느꼈던 지연의 감은 어느 정도 들어맞는 듯 했다. 하지만 명확한 증거가 없었다. 지연은 느리게 희정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의 눈은 지연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인형 같아. 지연은 종종 저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희정의 눈이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보다, 그녀의 눈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낀 지연은 그 뒤로 종종 말없이 희정을 빤히 바라보곤 했다. 지연이가 어디가 아픈 건 아니겠지, 하고 매번 걱정하던 희정은 이제 지연이의 이상한 눈길에 익숙해졌고,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다는 듯이. 아니면,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것처럼. 지연이는 희정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눈을 깜빡였다.
 
 "있잖아, 누나. 이게 다 꿈이면 어떻게 해?"
 "왜 그런 말을 해, 지연아."
 "……누나는 이미 답을 알아."
 
 무슨 답?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희정을 본 지연은 쓰게 웃었다. 말없이 고개를 내젓자 가느다란 주황빛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자신이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오해를 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누나가 미워."
 "지… 연아?"
 
 희정의 시야가 빙글 돌았다. 바르르 흔들리는 시야 가득 지연이가 차 있었다. 발랄한 주황빛 머리카락 사이로 곱게 내리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희정은 제가 똑바로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술을 마셔서 취했다거나, 지연이가 제 몸을 잡고 흔드는 것이 아님에도 시야가 일그러졌다. 누가 잡고 흔들어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희정이는 손을 뻗어 허공을 더듬다가, 몇 번의 헛손질 뒤에야 벽을 짚고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일 수 있었다. 지연은 아무 말 없이 희정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제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상냥하고 다정하게 대해 준 누나였다. 이제 와서 돌이키기는 너무 늦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이것도, 마술쟁이의 짓일까?
 
 "누나. 괜찮아? 귤이라도 줄까?"
 "……어? 아, 아냐. 괜찮아. 걱정시켜서 미안해."
 "누나아…… 많이 피곤해 보여. 혹시 누나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누나가 아프면, 지연이가 많이 슬퍼할 거야……."
 
 희정이는 귀를 축 늘어뜨리며 우는 듯한 목소리로 묻는 지연이를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방금 전에 지연이가 보여준 모습이, 묘한 분위기가─ 아직도 그녀를 옭아매는 것만 같았다. 희정이는 떨리는 손으로 벽을 꾹 짚으며 눈을 몇 번 깜빡였다. 흔들리던 시야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제 시야가 왜 그렇게 변했는지, 아픈 곳도 없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흔들리던 시야가 조금 진정되자, 벽에서 손을 떼고 제 치맛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이건 조금 이상하잖아.
 
 "누나. 피곤하면 조금 자도 돼."
 "난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 누나가 막 아프면, 내가 지수 형한테 혼난단 말이야. 지수 형은 못된 고양이야. 막 내 머리를 이렇게 때리고, 목욕도 안 해! 그리고 난, 누나를 문병하고 싶어~!"
 
 …간병이겠지. 희정이는 지연이의 말에서 틀린 점을 바로 알아차렸으나 바로 정정해 주지 않고 작게 미소 지었다. 이렇게 소소한 일인데도, 저를 신경써주며 항상 따르는 지연이가 있어서 행복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희정이가 눈을 부드럽게 접고 손을 뻗어 지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자, 지연이는 희정이를 따라 눈을 휘며 웃었다. 결국 지연이는 희정이의 손을 꼭 붙들고 침대에 눕혔고,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하더니 피곤했는지 곧 잠들어 버린 희정을 바라보며 침대 옆에 앉아있었다. 누나는 바보야. 괜찮다며. 중얼거린 말은 누구에게도 닿지 않고 안개처럼 흩어졌다. 희정이는 듣지 못하겠지만, '그' 사람은 듣고 있을 터였다. 아니, 보고 있다고 해야 할까? 지연이는 손을 뻗어 희정의 이마에 흐트러져 있는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을 쓸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에 감겼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누나를 좋아하는데…… 누나도 나를 정말로 좋아하고 있는 걸까……? 누나는, 누나가 아니잖아. 나는 정말로, '지연' 이야? 나 때문에 그 사람을 잃었다는 이 생각도, 내 기억도… 정말로 '나' 를 이루는 게 맞는 거야?"
 
 ─전부 알고 있어. 하지 못한 말이 입속에서 맴돌았다. 지연은 그 말을 씹어 삼켰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어. 내 눈앞에 있는 누나가 아니야. 그 말을 내뱉으면 지금 딛고 있는 세계가 부서져 내릴 것만 같았다. 지연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꾸욱 닫았다. 무서워, 누나. 말하면 전부 다 없었던 것처럼 돌아갈 것 같아. 상냥하게 대해주는 소중한 사람. 괜찮다고 말하며 몇 번이고 끌어안아주고 좋아한다 속삭여 주는 누나가 사라질까봐 두려워. 지연은 떨리는 손으로 침대 머리맡을 짚었다. 희정이의 머리카락이 곱게 흐트러져 이불 위를 수놓은 자리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나의 소중한 누나. 지연은 느리게 입술을 내렸다. 희정이의 하얀 이마에 지연이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있잖아, 누나."
 
 쓴 웃음이 입가에 걸린다.
 
 "나를 좋아하는 건 누나가 아니고, 그 너머에 있는 다른 누나지?"
 
 말을 마치고 나자, 주위에서 들리던 소리가 멈춘다. 고르게 들리던 희정이의 숨소리가 멎었다는 것을 알았다. 지연이는 느리게 눈을 들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세계에 홀로 서 있었다.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지, 허공에 떠 있는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어두웠다. 침대 머리맡에 짚고 있던 손은 뭔가를 만지려 했던 것처럼 허공에서 어정쩡하게 멈춰 있었다. 역시, 그랬구나. 지연은 작게 웃으며 손을 거둬들였다.
 
  "……누나는 참 바보야."
 
 결국 끝까지, 누나는 자기가 누군지 몰랐어. 지연은 저 멀리, 아득한 곳에서 다시 '되돌아가고' 있음을 알았다. 어쩌면, 자신이 눈치 챈 것들에 대한 기억이 전부 다 사라질지도 몰랐다. 기억을 먹고 사는 마술쟁이가 게임이 끝나기 전에 기억을 가져가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분명 기억이 사라질 터였다. 동물의 감이었다. 지연은 귀를 몇 번 쫑긋거리다가, 두 손을 깍지 낀 후 머리 뒤로 넘겼다. 작게 휘파람을 불고 나자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지연은 제 시야가 서서히 흐려지고 있는 것을 알았다. 짧게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린 지연은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새카만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누나, 보고 싶어. 속으로 중얼거린 지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음엔, 누나한테 상처주고 싶지 않은데. 그렇게 될까? 누나."
 
 
 
 

 
 
 "뭐야, 오류 걸린 줄 알았네. 왜 갑자기 화면이 그렇게 흔들리고 그래?"
 
 고요한 가운데 소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네모난 화면에는 주황빛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이 쓰게 웃고 있는 모습이 가득 차 있었다. 소녀는 팔을 움직여 마우스를 흔들더니, 몇 번 딸각거리는 소리를 냈다가 화면을 붙잡고 한 번 흔들었다.
 
 
 "공략 방법 봐도 나오지도 않는 얘기만 하고…… 아, 몰라. 왜 멈췄어? 이다음에 어떻게 하라고? 그냥 재부팅 한 다음에 다시 로드하지 뭐. 올클하겠다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끼익, 하고 의자가 소리를 냈다. 딸각. 버튼 하나를 꾸욱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황빛 소년이 가득 차 있던 화면이 까맣게 물들었다.  
 












“지연아! 드디어 네 차례야!!”
 
 누나는 나를 제일 마지막에 플레이했어.
 
 누나는 나를 많이 좋아해줬지 선택된 말밖에 하지 못했는데도 말이야. 그러면서 점점 내가 누나의 마지막 사랑이 되었으면 하고 슬쩍 바란 적도 있었어.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야.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이 마음은 닿을 수 없어. 
 
 
 
 ‘지루해’
 
 눈앞이 깜깜하다. 커다란 검은 공간에 혼자만 뒹굴 거린지 벌써 몇 개월이 지났다. 그녀가 게임을 실행하지 않은지 몇 개월이 지난 것이다. 
 
 다른 사람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다들 이야기의 끝을 보고나면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에 대해 잊어버린다. 그리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른 이가 선택을 받고 엔딩을 보고 잊어버리고를 반복하는데…… 
 
 “난 그대로야”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무도 없다 다른 공략캐, 마술쟁이, 심지어 그녀의 역을 대신해주는 ‘희정’이라는 꼭두각시조차도, 게임이 꺼지면 다들 먼지처럼 사라진다. 
 
 “누나는 뭐하고 있으려나~” 
 
 뒹굴 거리며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을 본 것은 몇 개월 전 나를 클리어 하던 날 즉, 게임이 끝나던 날이다. 그 이후로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하고 싶은 말을 할 걸 그랬어…”
 
 한숨을 푹푹 쉬며 후회했다. 지금 이렇게 그녀를 기다리고 있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게임은 끝났다. 그 말은 더 이상 그녀가 나를 만나러 올 이유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 아무튼 누구 안 나오나? 왜 나만 이렇게 덩그러니 있어야 하는 거지.”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툴툴거리며 검은 공간을 뒹굴뒹굴 굴러다녔다. 
 
 “그거야 당연하죠. 당신은 이곳에 바이러스 같은 존재니까요. 후후후.”
 
 
 갑자기 지지직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주변이 밝아 졌다.
 
 “?! 뭐야? 누구야!”
 
 눈부셔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고, 고양이랑… 토끼?!”
 
 차츰 빛이 줄어들면서 오랜만에 듣는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건… 
   
 그녀였다.
 
 너무나 보고 싶었던 그녀의 얼굴이 지금 내 눈앞에 보인다.
 
 “오랜만이야 누나! 보고 싶었어!” 
 
 너무 반가운 나머지 상황파악도 안 된 상태에서 나도 모르게 말을 걸어버렸다. 
 
 그리고 동시에 움찔했다.  
 
 이건 누구 목소리지?  
 
 끼기긱 거리며 듣기 싫은 기계음이 퍼졌다. 기계음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어, 어?”
 
 또다시 기계음.
 
 “누, 누나 내 목소리 안 들려?”
 
 그 소리를 들은 그녀는 고장이 났다 생각했는지 기계를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
 
 난 분명 말을 했다. 하지만 나온 건 기계음이었다.
 
 이걸로 확실해 졌다. 난 정해진 말밖에 할 수 없는 거야. 
 
 
 그 뒤로 그녀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그토록 원하던 상대가 눈앞에 있는데 입 한 번 뻥끗 못하다니 이래서야 저 꼭두각시들과 다를 게 없잖아……! 
 
 속으로 분해하고 있을 때,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 졌다. 뭐지? 
 
 
 “드디어 사람이 될 때가 다가왔군요. 그런데 그녀에게 말을 못 걸어 어쩌죠? 후후후” 
 
 지지직거리는 목소리……처음 정신이 들었던 목소리였다. 그때는 심한 기계음으로 인해 제대로 누구인지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여전히 기계음이 들리지만 그래도 누구의 목소리인지 또렷하게 들렸다. 
 
 “넌… 마술쟁이?” 
 

 왜 마술쟁이가 여기 있는 거지? 내 기억에는 여기부분에서 마술쟁이가 나오는 부분은 없었다. 
 
 “제가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하신 모양이군요.”
 
  얄밉게 웃는 얼굴로 마술쟁이가 말한다. 어째서인지 이제 마술쟁이의 목소리에 기계음은 차츰 사라졌다.
 
 “.....”  
 “그렇게 쏘아보시지 마시죠. 그냥 당신이 어떻게 하고 있나 보러왔을 뿐입니다.”
 
 입에 조소를 머금고 마술쟁이가 말했다. 그에 뭐라 답 하려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몸 전체가 굳어버렸다. 내가 당황하던 모습을 보던 마술쟁이는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귀찮은 존재에요. 바이러스 주제에 타의로는 없어지지도 않고 말이죠.” 
 
 ……내가 바이러스라고? 눈이 크게 떠져 무슨 말이냐는 뜻의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마술쟁이는 신경 쓰지 않고 하던 말을 계속했다. 
 
 “뭐, 하지만 그게 다이니 상관없나요? 어차피 당신은 그녀에게 말조차 걸지 못하니까 말이죠. 후후후” 
 
 그걸 끝으로 주변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왠지 기분이 더 더러워졌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그녀가 밤늦게 마다 들어와 꾸준히 플레이를 해서인지 어느새 이야기는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누나랑…계속같이 있고 싶어!”
 
 아니 우린 계속 같이 있을 수 없다. 이 벽이 나와 그녀를 가로막고 있는 이상 불가능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간절히 원하면…… 함께 있을 수 있어”
 
 거짓말. 
 
 난 거짓말을 하고 있다. 비록 정해진 대사를 말하는 것 이지만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녀와 나는 아무리 간절히 원하고 원해도 언제나 함께 있을 수 없다. 절대로 
 
 그건 누나도 알잖아 누구보다 더 잘 알잖아… 그런데도 어떻게 나를 좋아해 주는 거야? 
 
 서러움과 답답함 그리고 의문이 뒤죽박죽 섞여 하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녀에게 말하고 싶다. 이때까지 기다리며 이것저것 생각했던 걸 전하고 싶다. 
 
 하지만 닿지 않아.
 
 누나 점점 게임의 끝이 보이고 있어…… 게임이 끝나면 이번에도 누나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지? 나 말고 다른 녀석을 만날 거지?
 
 그 생각까지 미치자 분신을 부러질 듯 안았다. 하지만 분신은 아파 소리를 지르거나 부서지지 않았다.
 
 누나, 누나를 내 걸로 만들고 싶어. 언제나 곁에 두고 보고 싶어.
 
 그녀와 짧은 시간이라도 좋으니 대화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사실 조금 꺼려지긴 하지만……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닿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꼬마 고양이씨. 오랜만이군요.”
 “네가 올 거라는 건 알고 있었어.”
 “…시간이 다 되가는 거지?”
 
 각오하고 있었다. 언제오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그녀와 헤어질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결말은 언제나처럼 이미 정해져있다.  
 
 “잘 알고 계시군요.” 
 
 “…마술쟁이, 나와 거래하자”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다를 것이다.
 
 
 
 
  드디어 마술쟁이와 지연이가 만났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을 하며 마우스를 클릭하는 순간, 시끄러운 기계음 소리와 함께 화면이 하얗게 변하더니 다음화면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어라?
 
 한동안 괜찮더니 또 이런다. 
 
 “요즘 정말 왜 이러지? 바이러스라도 걸린 건가?” 
 
 지인들에게 물어봤지만 다들 괜찮다고 하니 체리츠의 서버오류는 아닌 것 같다. 
 
 그럼 내 컴퓨터 잘못이란 건데…… 정비라도 맡겨야 하나하고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 
 
 “감탄했습니다. 경쟁자를 모두 멀리 보내고 히로인을 독차지 하다니, 다시 봤어요.”
 
 비아냥거리는 마술쟁이의 목소리가 들리며 게임이 계속 진행되었다. 
 
 “오류였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의아했지만 게임에 집중하느라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진행하였다. 
 
 “넌 왜 그녀에게 집착하지?”
 
 마술쟁이가 지연이의 말을 듣고 집착이라는 단어를 되묻듯 말하더니 당연하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가지기 힘든 것 일수록 더 가지고 싶은 법이죠.”
 “.......”
 
 마술쟁이가 싱긋하고 웃고 있는 반면 지연이는 알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을 하고 있다. 음? 저건 처음 보는 표정인데?
 
 대사도 예전에 들었던 것과 조금 다른 것 같아 의아했지만 중요한건 그것이 아니다.  
 
“ 내가 놓친 지연이의 표정이 있다니!!”
 
 나는 얼른 처음 보는 지연이의 표정을 찍기 위해 캡쳐 프로그램을 켰다. 
 
 그와 동시에 창 아래로 디지털시계가 늦은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 보였다. 
 
 “플레이하다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나는 내일 아침 피곤에 절어 있는 것은 사양하고 싶으므로 기분 좋게 캡쳐를 하고는 찍은 사진을 확인하지 않고 바로 게임을 플레이했다. 
 
 그 뒤로는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큰 변화 없이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그때까지 부디 행복한시간 보내세요. 이게 그녀와의 마지막일지라도 말이죠. 후후후”
 
 
 ……방금 마술쟁이가 뭔가 중얼거린 것 같은데, 지지직거리는 기계음 때문에 정확히 듣지 못했다. 컴퓨터 점검 맡겨야 하나? 
 
아무튼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시간이 조금 늦었어도 오늘 안에 엔딩을 보겠다는 집념으로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지연이가 사람이 된 cg가 화면을 채웠다.
 드디어 끝이다!!! 신나하면서 한편으론 아쉬워하며 마우스를 클릭해 화면을 넘겼다.
 
 “……어라?”
 
 이상했다. 화면이 온통 하얀색이다. 월래 이 부분에선 엔딩화면이 떠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던 중 갑자기 노트북에서 지연이의 목소리가 나왔다.
 
 “드디어…… 드디어 게임이 끝났어, 누나.”
 
 조금 흥분한 지연이의 목소리로 들리는 듯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뭐지? 전엔 이런 건 없었는데? 하얀 화면에는 목소리에 따라 자막이 쳐지고 있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내 목소리가 들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연이를 불러보았다. 
 
 “지, 지연이니?”  
 “맞아!! 내가 지연이야!! 내 목소리가 들리는구나!”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 늦게까지 게임을 해서 환청이 들리는 건가…? 표정이 굳은 게 저쪽에서도 보이는지 지연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누나 표정이 좋지 않아 어디 아픈 거야?” 
 “……”
 “누나…?”
 “아, 아냐 난 괜찮아! 괜찮고 말고 하하하…”
 
 잠시 멍하니 있었다. 내가 컴퓨터랑 대화하고 있어…… 그러니까 지금 게임의 공략캐가 말을 걸어오고 있는 상황? 
 
 “표정이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 하긴 이렇게 늦게까지 게임을 하고 있었으니 피곤할만하겠다”
 
 지연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간신히 입을 열어 물었다. 
 
 “이…이게 어떻게 된 거야? 너 어떻게 나한테 말을…” 
 “마술쟁이와 계약했어. 누나와 잠시 대화하는 것과 나란 존재를 맞바꿔서.”
 “그게 무슨…”
 “그런 것보다 누나…”
 
 지연이 나의 말을 자르고 진지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누나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은 잠깐이라 하고 싶은 말을 다할 순 없지만 누나에게 꼭하고 싶은 말이 있어.” 
 “……”
 “고마웠어… 누나와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날 좋아해 줘서. 정해진 대사 정해진 표정 밖에 못하는 나를 좋아해 줘서 정말 정말 고마워. 누나에게 말을 걸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 두근거리고 기분 좋은 설렘에 계속 옆에 있고 싶어”
 
 
속사포처럼 말하던 지연이가 잠깐 말을 끊더니 조금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안 되겠지?” 
 
 “누나 날 잊지 마… 만약 내가 없어지더라도… 내가 누나를 많이 많이 좋아하고 사랑했다는 걸 잊지 말아줘”
 
 잠깐이었지만 화면에 지연이의 모습이 비쳤다. 울면서 웃고 있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덴더라이언이 종료되었다, 태풍이 순간에 지나간 것 같다. 마지막 지연이의 모습이 잊혀 지지 않는다. 
 
 컴퓨터를 보며 중얼거렸다. 
 
 “나야말로 고마워… 나에게 즐거움을 줘서”
 
 창밖으로 새벽 햇빛이 조심스레 들어오고 있었다.













  지은은 사실…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 너머에 있을 그녀에게 자신들은 그저 '게임 캐릭터'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쯤은. 자신들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게임'이란 것 속의 존재라는 것은 그들 중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지은은 그녀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가슴이 아팠다. …누군가로부터 만들어진 세계일망정 분명 여기 이곳에는 세계도, 자신들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기에.
 
  자신들이 게임 캐릭터라는 것도, 비록 게임 속 세상이지만……이곳에서 엄연히 개인적인 자아를 가지고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만, 그녀는 이 사실을 모르겠지만.
 
  …그녀를 단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었다면 거짓말. 하지만 아무것도 모를 그녀를 마냥 탓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언제부터인가 그녀가 자신을 알아줬으면…하는 작은 바람과도 같은 것이 조금씩…아주 조금씩 싹트고 있었다.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다는……간절하고도…작은…소망.
 
  하지만 지은은 하루에 수십 번도 더 넘게 생각했을 그 말을, 그 바람을 차마 그녀에게…꺼내놓을 수 없었다. 그녀가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어리광과도 같은 이 마음 때문에 그녀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두렵기도 했으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예지 능력으로도 볼 수 없는 그 뒤의 일이 지은은 두려웠다.
 
 
  "에디…."
  "도련님…?"
 
 
  지은은 조금 놀란 듯 자신을 불러오는 목소리에 오늘도 변함없이 상냥한 자신의 기사에게 살며시 기대어 그동안 아무도 모르게 꼭꼭 숨겨두었던 속마음의 일부를 털어놓았다.
 
 
  "에디…그녀를 생각하면……가슴이 아파……. 어째서일까……."
 
 
  느릿하게 끊어질 듯하면서도 실낱같이 이어지던 목소리가 멈추자 은발의 기사는 슬픔에 젖은 자신의 어린 주군을 위해 말없이 자신의 품을 빌려주었다. 도련님……. 은발의 기사는 그저 안타까움을 가득 담아 어린 주군이 조금이라도 위로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여리고도 작은 어깨를 조심스럽게 토닥여주었다.
 
 
 
***
 
 
  지은은 자신에게 사과를 깎아주는 희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 너머의, 지은으로서는 볼 수 없는 그곳에 있을 그녀를 그리고 있었다. 오늘도 예쁜 홍옥 같은 눈동자는 애틋하고도 처연한 빛으로 물들어갔다. 그녀, 희정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녀를 볼 때마다 자꾸 그녀를 떠올리게 되는 건 지은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은은 조금 우울해진 기분으로 희정이 깎아주는 사과를 받으며 그녀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이 사과를 좋아하는 것처럼 그녀 역시 사과를 좋아할지, 어쩌면 그녀 또한 자신처럼 브로콜리를 싫어할지. 어떤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웃는 모습은 어떤지….
 
  매일매일을 그녀에 대해 생각해보아도 그녀에 대해서라면…정말 사소한 것 하나라도……아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다시 한 번 그녀의 존재를 허상과도 같게 만들어 지은을 슬프게 했다. 오늘따라 평소에는 달기만 했던 사과마저도 지금은 그저 쓰게 느껴졌다.
 
 
  …지금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어? 내 앞의 그녀처럼 당신도 나를 보며 웃고 있을까…?
 
 
  "당신도 웃고 있다면 좋을 텐데…."
 
 
  지은이 무심코 내뱉고만 그녀에게는 닿지 못할 속마음의 한 자락은 창밖의 푸른 하늘 속으로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얀 소년은 소년의 어지러운 마음과는 달리 오늘도 변함없이 맑고 아름다운 하늘을 바라보며 그저 서글픈 미소 한 조각을 띄울 뿐이었다.
 
 
 
***
 
 
 
  지금 내 품에는 이렇게…따스한 온기가 느껴지지만 이 온기는 당신의 것이 아니야.
 
 
  지은은 품 안의 희정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초점이 흐려진 붉은 눈동자는 희정을 보고 있되 보고 있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리고 어째서였을까. 이렇게 얼굴도 모를 그녀에게 빠져버리게 된 것은, 정말…어째서였을까.
 
 
  처음에는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캐릭터라는 것도, 이 세계가 누군가의 창조물이라는 것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본능적인 미약한 거부감과 그에 따른 불쾌감 정도는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희정' 너머의 통칭 '플레이어'라고 불리는 존재인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얼굴도 목소리도 알 수 없는 존재인 그녀는 지은의 고려 대상에는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었다. 분명, 그랬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지은 자신조차도 정확히 정의내릴 수는 없었지만 게임이 진행될수록 희정을 통한 그녀의 행동,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얕은 빗방울이 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 깊은 곳까지 촉촉이 적셔갔던 것 같다. 비록 그것이 거짓인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얕은 호감이 되고, 애정이 되고, 마침내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커져 버려서…이제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로 행복하고, 당장에라도 눈물이 날 것처럼 아리게만 느껴질 정도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있지, 당신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시간이 아주 많이 다르다고 알고 있어. 이곳에서의 하루가, 한 달이…당신의 세계에서는 고작 해봐야 몇 분, 몇십 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니.
 
  당신에게는 이 모든 시간이 겨우 한순간, 이라는 단어 정도로 밖에 정의되지 않는 걸까…?
 
 
  지은은 문뜩 불안해졌다. 혹시라도 게임이 끝나고 나면 그녀가 자신을 잊어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그래, 비유하자면 마치 마술쟁이한테 기억을 빼앗기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자신을 잊어버릴까 봐 겁이 났다. 그리고 겨우 그녀에게 자신은 그 정도-,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아려와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파르르, 떨리는 한 쌍의 속눈썹이 마치 지은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당신과 닿을 수 있다면……지금 나를 괴롭히고 있는 이것들이 조금 정도는 사라지지 않을까…?
 
 
  지은은 충동적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텅 빈 허공으로 손을 내뻗어보았다. 그리고 눈꼬리를 살짝 접어 옅은 미소를 그려내었다. 아름답지만 어쩐지 조금 쓸쓸한 느낌을 주는 당장에라도 사그라질 듯한 그런 미소였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러도 좋으니까……언젠가는 당신과 닿을 수 있기를…."
 
 
  하얀 소년은 창밖으로 흩날리는 민들레 홀씨를 바라보며 아마도 그녀에게는 닿을 수 없을 간절한 바람을 중얼거렸다.
 
 
 
 










 [드디어 만났군요.] 
  
 
  마치 깡통이 자판기에서 툭, 하고 떨어지듯 이젠 진저리가 날 지경인 로그를 한번 더 던진다.
  
 이번이 몇번째더라, 이번만 클리어 하면 올클리어니까 적어도 다섯번째구나. 
 
  
 [누…누구세요?]
  
 
 내 멍청한 추측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짜 당신은 저런 말을 하지 않을거야. 벌써 다섯번째 당신의 앞에 나타난 날 보며 탄성을 내지를지도 모르고, 띠껍고 경멸에 가득찬 눈으로 날 바라볼지도 모르지.  
 
  
 그래도…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다시 한번 당신과 눈을 마주치고 대화하는 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다고요.]
  
 
 기다렸다는 이 말은 거짓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야.
  
 
 
 
 
 알다시피 난 공략캐릭터가 아니야. 그렇다고 주인공을 돕고, 이야기의 흐름을 매끄럽게 만드는 서브캐릭터냐고? 그것마저 아니야.
서럽게도, 난 어쩌면 엔딩을 더 비참하게 만드는 히든 캐릭터야. 모든 흑막속에 숨어있는 라스트 보스.
 
 클릭 두어번 후면 당신은 내가 미쳤다고, 당신은 날 모른다고 대답하겠지? 아니, 당신은 날 알아.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아?  
 
 저기, 그거 알아? 난 아직도 엄청나게 혼란스러워. 
 
 난 오랫동안 사랑과 함께 내가 사랑하는 히로인을 바라봐왔어. 느낌상 꽤 오래되었겠지. 하지만…….
 
 내가 미치도록 사랑하는 히로인, 나의 히로인은 누구야? 당신이야? 아니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여자야? 
 
 아니, 당신은 누구야? 
 
 당신의 놀란 얼굴을 보며 난 생각해. 난 왜 여기 있는거지? 왜 당신에게로 찾아갈 수 없는거지? 
 
 아니, 애초에 날 만든 사람들은 내가 화면 밖에서 날 보고 있을 당신을 생각하며 무얼 하라고 날 창조해놓은거지? 
 
 
 팟---- 
  
 
 [휴우...] 
 
 드디어 화면이 꺼졌군요, 당신은 이제 날 보지 않기를 선택한걸까요? 
 
 히로인, 당신은 알고 계실까요? 이곳은 뻗고있는 내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고, 무섭습니다. 
 
 아마 당신이 말하는 밤..이라는 시간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어둡고, 괜히 가슴이 불안으로 인해서 뛰고 있습니다. 
 
 근데 그것보다 더 무서운건… 정말, 정말 무서운건…
 내가 이 어둠속에 있을때, 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아서 더 무섭습니다.
 이걸 보고 있는, 꼭두각시 뒤에 있는 나의 히로인에게 묻고싶습니다,
 
 당신은…  내 짐작이 맞다면 이건 "당신의" 간절한 소망이 아닌 꼭두각시의 소망이니 당신의 기억은 피해를 입지 않겠죠, 당신은, 나의 히로인은 내가 아예 이곳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날 기억해 주시겠습니까? 
 
 이 짧은 만남 이후, 알 수 없는 일이 생겨 당신이 날 볼 수 없다고 해도 기억해 주시겠습니까? 
 
 저 꼭두각시가 아닌, 당신의 대답이 정말 듣고 싶어요, 나의 히로인. 
 













[마지막으로 하나 물어봐도 돼요?]
[두 개 여쭤보셔도 됩니다.]
      

  네가 질렸다는 미소를 짓자 그도 부드럽게 웃었다. 네 가지의 스탠딩 중 가장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하마터면 준비해둔 물음표까지 그냥 삼킬 뻔 했던 것이다. 꼭 물어봐야 할까. 마지막인데. 착각이란 걸 깨달았다고 해서 굳이 거기서 벗어날 필요가 있을까. 어쨌거나 너는 행복했는데.  
 
  그럴 수가 없어 끝내 네가 묻는다.
    
[어째서 그녀를 사랑해요?]
  

  그녀였다. 네가 아니라. 알고 있었고, 그래서 속아주지도 못했다. 물어보지 않을 수는 더더욱 없었다.
  너였다. 그가 아니라. 네 착각이었고, 그리고 네 기대였다. 속아주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그는 널 속이려 한 적이 없다.
 
  결국 그건 그냥 네 소망이었을 뿐이다. 그가 유일하게 들어주지 못할.
  남의 소원을 이뤄주는 마술쟁이는 본인이 소원인 상황을 아직 마주한 적이 없다. 
 
[아직 사랑을 해보지 않으셨군요.]
  

  천연덕스러운 보랏빛 미소가 빛났다. 네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차마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던 너는 대신 그의 소매에 시선을 묻은 채 한참을 가만히 그러고만 있었다. 정곡을 찔러버렸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재촉하지 않았다.
  일렁이는 초록색이 네 눈동자까지 물들일 무렵에서야 너는 드디어 고개를 들어 모니터를 똑바로 응시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에 더 이상 망설임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 하고 있어요.]
[…그렇습니까.] 
 
  잠깐 뜸을 들이고 대답이 떠올랐다. 마침표 옆의 삼각형 커서가 맥박처럼 깜빡거리고 있었다. 물론 그에게 심장은 없다. 그래도. 
 
[어째서 저를 사랑하시죠?]
  

  족족 마음에 들지 않는 반응이었다. 질문의 목적은 대답이지 질문이 아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대화에서 이런 화법은 상당한 무례에 속하지만, 지금 네게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이것은 일반적인 대화가 아니다. 일반적인 상대 역시 아니다.  
 
[당신은 나랑 대화할 수 있으니까.] 입이 아닌 손가락이라 해도. 
  
  너는 아직 기억한다. 그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던 그 첫 새벽을. 수차례를 플레이해 외우다시피 했던 네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대사가 떠오르던 순간의 경악을.
  특이하게도 너희의 대화에 필요한 감각은 오로지 시각뿐이었다. 그래서 엄밀히는 대화가 아닌 필담이었다. 그가 게임의 궤도를 이탈한 후로 너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은, 꿈이 아닌 현실로 판단한다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목소리가 나왔다면 너는 끝까지 진짜라고 믿지 않았을 것이다.
  말은 온전히 그의 것이다. 그러나 목소리는 성우의 것이었다. 완전히 들어맞지는 않지만, 가장 비슷한 비유를 들자면 성우는 스피커였다. 그의 대사를 네게 청각적으로 출력해주기 위한 변환 장치였다. 이 모든 설명은 결국, 이것이 게임이고 그가 2D 캐릭터라는 전제 하의 ‘진짜’ 현실이라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설득력을 실어주는 근거가 된다. 들리지 않기에 오히려 성립되는 황당한 신뢰. 미리 녹음된 팬서비스가 아니라는 억지 같은 사실.  
  
  결국 그의 목소리는 원래 없다. 들을 수가 없다. 우스갯소리지만, 차원이 다른 이상은.
  그래도 너는 조금 궁금하다.
  

[언제부터 저를 사랑하셨죠?] 
  
  하지만 네 시작은 그의 목소리가 들리던 시절. 목소리만 들리던 시절.
  ‘대화’가 불가능했던 시절.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사랑했었다.
   

  그가 너를 알아보기 전에도. 다른 여자를 쭉 기다리며 집착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한낱 게임이란 걸 알면서도, 그런 네 자신이 죽도록 쪽팔리고 한심해서 가끔 다 뒤집어 엎어버렸다가 결국 또 다시 처음부터 마우스를 딸깍거리는 그 반복을 견딜 수가 없었어도.
너는 희정이였지만 희정이는 네가 아니었다. 그 간단한 명제 하나를 인정하기가 그렇게도 힘이 들었다.
 
[그런 겁니다.]
  

  그녀를 지켜보기 위해 몇 번이나 시간을 거스른 그를 지켜보기 위해 몇 번이나 시간을 거스른 네 세이브 데이터.
  가히 환상의 궁합이었다. 환장할 만큼.
  어쩌면 그렇게 하는 짓들이 똑같은지.
   
[너무하네요.]
[…부디 용서해주세요.]
 
  그것은 결코 비아냥이나 조롱이 아니었다.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빈정이 아닌 진심 어린 사과라고 해서 억지로 괜찮아진 척할 필요는 없다. 받을 수 없을 때 떠맡기는 사과가 더 비참하고 더 서러운 법이다.
  하지만 너는 눈꺼풀을 떨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엔 받아들고야 말았다. 받을 수 없을 때가 있다면 줄 수 없을 때도 있는 법이다. 그게 지금이었다. 지금밖에 줄 수 없었기에.
   
  어쩔 수가 없어서. 그도, 너도. 정말로 어쩔 수가 없어서.  
  
[…괜찮아요.]
[……죽은 사람도 살리는 마술쟁이 체면이 말이 아니네요.]
       
  네 말이 끝나자 그가 머쓱하게 덧붙였다. 잦아드는 네 대답에도 불구하고 그렇게까지 근심스러운 어조는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네 울적함에 장단을 맞춰주지 않겠다는 치기 같기도 했다. 그래도 될 상황에, 그래야 할 상황에 일부러 그러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항상성. 무겁게 건네야 할 사과를 짐짓 가볍게 던져 아무 것도 아닌 양 넘기려는.
  그게 너무 보여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련하게 보내줄래야 보내줄 수가 없는 태도였다. 기실 그의 깃털 같은 사과는 어떻게 보면 네 우울을 타파하는데 꽤 효과를 보기야 했다. 문제는 그 타파의 방식이 해소가 아니라 악화였다는 점이지만.
   
[저기요.]
   
  그럼 다른 소원은요? 반쯤 화난 네 얼굴에 그가 순간적으로 동요하던 기색을 재빨리 지웠다. 평소처럼의 유들유들한 미소가 너를 달래려는 듯 물어왔지만 더 이상 통할 리가 없었다.
   
[대가가 필요할 텐데요.]
[아닐걸요?]
   
  아니라고요? 이번에는 숨기지 조차 못한 당황을 뚝뚝 흘리며 그가 멍청하게 되물었다. 뭐, 그렇게 큰 소원은 아니라서…… 소원은 아니고, 부탁 정도? 새치름하게 대답하는 너를 보면서도 그는 여전히 얼빠진 얼굴이었다.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너는 다시 참을성 있게 또박또박 일러 적어주었다.
       
[말해주세요.]
[말.] 그가 멍하니 따라했다.
[내가 가장 원하는 말.]
   
  말해주세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마침표를 찍을 때에서야 그의 얼굴에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래서 다행히 무슨 말이요, 하고 바보같이 물어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명색이 마술쟁인데야 체면이 있는 법이다.
   
[마지막이잖아요.]
   
  재촉하듯 네가 다시금 마무리 쐐기를 박아 넣었다. 탁 하고 웃음을 떨어뜨린 그가 졌다는 듯 눈을 감았다. 말을 고르는 중이란 걸 알아 너는 이제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사실 무슨 말인지는 너도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모르는 척. 고민하는 척. 궁금한 척.
   
[……부디 마음에 드시면 좋겠습니다만.]
   
  부러 할 필요도 없는 걱정을 하면서. 짜고 치는 연극을, 둘 다 간신히 미소를 참으며.
    
―――사랑해요. 나의 히로인.
       
  그리고 너는 비로소 얼굴 가득히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정답이었다.
     
―――고마워요!
     
  진심이었다. 단순히 녹음되어 있던 목소리였대도. 그래서 가능했던 일이래도.
  비록 그의 히로인이 네가 아니더라도.
       
  네 고마움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아아아으아악, 그 놈의 치킨!!"
 
 나는 머리칼을 헤집으며 모니터 화면의 「BAD ENDING」이라는 글자를 노려보았다. 이번엔 어찌 잘 넘어간다 싶었더니 또 이 엔딩이다. 치킨 집을 경영해서 먹여 살린다느니, 아무리 평소 치느님, 치느님 떠들어도 그것까진 아니잖아. 성우의 목소리가 입혀진 고백 장면은 제법 귀엽지만 이것도 한 두 번이지, 몇 번이나 반복해서 치킨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면 짜증이 치민다. 원래 공략해야 할 것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으로 변하는 동물 남정네들인 것을…!
 
 게임을 구매하고 플레이를 시작한지 이틀. 새벽까지 잠잘 시간 쪼개어 쏟아 붓고 있건만 아직까지 본 엔딩은 평범한 이 조연 안경남 뿐이다. 그것도 베드 엔딩이란 타이틀을 단 이 녀석을…! 
 
 
 하아. 
    
   
 한숨을 내쉬고 화면을 클릭했다. 이제 또 배경음과 함께 민들레 홀씨 날리는 타이틀 화면이 날 반기겠지. 풀 음성지원이라 그걸 또 일일이 들으며 플레이하는 나는 오늘도 결말을 못 볼 테고…. …응?
    
   
 달칵
   
    
 달칵달칵
    
   
 몇 번을 더 눌러봐도 변하지 않는 검은 화면에 의구심이 들었다가 이내 짜증이 올라왔다. 안 그래도 연속으로 베드 엔딩 떠서 짜증나는데 이놈의 컴퓨터는 렉까지 먹었나. 중얼거리면서 손가락은 익숙하게 각각 컨트롤과 알트, 그리고 딜리트 버튼을 찾아 눌렀다. 렉 먹을 땐 강종이 짱이지.
 
 "여태 안자니?"
 "엄마야!"
 
 심장 떨어지는 기분으로 비명을 지르고 뒤를 돌아봤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반쯤 열린 방문 너머에서 고개만 내민 엄마가….
 
 "놀랬잖아!"
 "한밤중에 소리 질러서 사람 깨운 게 누군데."
 
 한심하단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그, 그러고 보니…. 베드 엔딩 떴다고 열 받아서 소릴 질렀던가.
 
 "얼른 자라?"
 "……."
 
 네에…. 얌전히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보면 새벽 두시를 가리키고 있다. 어제도 이거 한다고 늦게까지 깨 있어서…. 할 말이 없다. 게다가 내일은 월요일이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문을 닫는 저 철두철미함. 안 해…. 안한다고!…는 내일이면 다시 게임을 켜겠지. …돈 내고 산 게임인데 엔딩은 다 봐야하지 않겠어? 
 
 
*
 
 「선배!」
 
 "……."
 
 
 컴퓨터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그와 함께 마우스가 클릭되면서 다음 대사의 목소리가 헤드셋 너머에서 들려왔다. 말하지 마…. 너 싫어질라 그래…. 나 울고 싶어….
 엔딩에 다 왔었는데…. 왜 다 와서 너로 빠지는 건데….
 
 치직, 치지직
 
 이번엔 헤드셋이 말썽이냐. 듣기 좋지 못한 노이즈가 울려 들렸지만 벗기도 귀찮다. 화면을 올려다봤다간 정말로 희재가 싫어질 것 같아서 마우스만 마구 클릭했다. 이러다 오늘도 엔딩 못 보겠다. 중간에 세이브한 게 있으니까 처음부터 하는 절망적인 상황은 없겠지만 같은 이벤트를 또 봐야하는 거잖아….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이쯤이면 타이틀로 돌아가 재생됐을 배경음악이 들리지 않았다. 
 
 …?
 
 고개를 들었다. 원래라면 넘어가고도 남았을 동아리의 배경화면이 그대로. 희재의 스탠딩 CG도 그대로. 대사 창에 눈이 갔다. 어째선지 비어있는 대사 창에, 설마 또 렉이 걸린 건가 인상을 쓰려던 차 노란색 글씨가 빠르게 하나씩 떠올랐다.
 
 「이제야 눈치 채고 멈춘 거예요?」
 
 
 …뭐?
 
 머릿속에서 뭔가 반응하기도 전에, 글자가 사라지고 다음 말이 나타났다. 
 
 「아무리 베드 엔딩 타이틀을 달았어도, 그렇게 마구 넘겨버리면 상처 받거든요?」
 「기껏 말하고 있는 목소리도 끊고.」
 「하긴…. 몇 번이나 같은 대사를 봤으니 질릴 만도 하려나.」
 
 클릭 질은 이미 진작 멈춘 채였다. 자동진행에 체크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대사는 마치 자동진행을 선택한 것처럼 충분히 읽을 텀을 남기면서 새로운 글자를 보여주고 있었다.
 
 게다가 대사의 내용은…. 마치…. 플레이어인 '희정'이 아니라 바깥의 '나'를 보고 말하는 것 같은, 그런 텍스트. 
 
 이건 대체…. 
 
 「-선배, 라고 부르기엔 어폐가 있네요. 당신은 이 학교에 다니지 않으니까.」
 
 확실히, '나'를 향해 말하고 있다. 동시에 나는 지금의 희재가 플레이하면서 본 것과는 캐릭터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사투리 억양으로 말하는 목소리가 입혀지지 않아서인가? 그렇게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고 있으니,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새로 글자가 나타났다.
 
 
 「당신에게 들려줄 수 있는 건 정해진 대사의 목소리뿐이에요.」 
 「내 진짜 목소리 같은 건, 닿지 않겠죠. 아니, '진짜 목소리'라는 게 있기는 할까?」
    
   
 자조적인 어투의 텍스트였다. 나는 가만히 눈으로 읽히는 그것들을 받아들였다. 아니, 받아들이기 위해 어떻게든 생각했다. 게임 캐릭터가 말을 걸고 있다. …이건 현실? 혹시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거 아닐까? 어쩌면 플레이하다 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께도 어제도 밤늦게까지 게임 했잖아. 꿈에서까지 희재 엔딩이라니…. 그거 무지 암담한데.
 
 「그보다는 당신…. 게임 너무 못하는 거 아니에요?」
 
 
 윽. 정곡을 찔렸다. 
 
 
 '꿈'이라 인식했기 때문인지, 이 기묘한 상황이 좀 더 편안하게 받아들여졌다. 
 
 나는 뚱하니 연달아 '말하고' 있는 희재를 바라봤다. 
 
 「그렇게 몇 번이나 반복하면서 엔딩 하나 못 본 사람은 당신뿐일걸요.」
 「능력치는 제대로 올린 거예요? 정보 창은 꼬박꼬박 확인하고 있어요? 한 사람 공략할 땐 어장관리하지 마세요. 호감도도 웬만큼 달성 못하면 엔딩 못 봐요.」
 
 "……."
 
 게임 캐릭터한테 훈계 당하고 있다…. 게임 캐릭터한테 어드바이스 받고 있어…. 허탈하게 웃으면서도 종이 조각을 찾아 메모했다. 근데 깨면 이거 없어지는 거 아닌가? 이전에 저 정보가 맞긴 한가? -이건 꿈인데.
 
 그런 생각이 들어 적어 내리던 메모지를 책상 구석으로 밀어놓고 하품했다. 침대 밑으로 들어가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니, 끝도 없이 졸음이 쏟아졌다. 잘까. 꿈에서 잔다니 이상하지만…. 
 
 마우스에 손을 올리고 오른쪽 버튼을 눌렀다. 
 
 
 「종료 하는 거예요?」 
    
   
 노란 텍스트가 다시 떠오른 것이 보였다. 응…. 그래…. 자러 갈 거야…. 긍정의 뜻을 담아 마우스를 클릭했다.
 
 정신이 몽롱해서, 컴퓨터가 제대로 꺼졌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침대에 누워 이불을 감싸 안았다. 아, 따뜻해…. 
 
 
*
    
   
 눈을 뜨면 아침이다. 어째 별로 잔 것 같지도 않은 기분에 밍기적 일어나 옷을 챙겨입었다. 지금…. 몇 시…헉.
 
 "엄마!! 왜 안 깨웠어!"
 
 쿵쾅쿵쾅 방 밖으로 나가 소리쳤다. 부엌에 있던 엄마는 심드렁하니 나를 돌아보고 툭 말을 내뱉었다.
 
 "뭘, 깨워도 안 일어나더만."
 "그래도 더 깨웠어야지…!"
 
 울상으로 원망하는 소리를 내뱉었지만, '늦게까지 안 자고 게임하니까 그렇지-!'하고 타박하는 목소리가 나를 찔러 와서 짜증스레 받아치고 신발을 신었다. 참, 가방…!
 
 "엄마, 나 가방!!"
 "나올 때 안 챙기고 뭐 했어?"
 "아 빨리!"
 
 한숨 쉬며 방으로 들어 가 가지고 나온 가방을 받아들며 뭐라 더 말하려는 엄마의 목소리도 듣지 않고 박차듯 밖으로 나왔다. 엄만 맨날 잔소리야! 괜한 짓이란 걸 알면서도 엉망이 된 아침을 엄마 탓으로 돌리고, 급하게 정류장으로 향했다. 아슬아슬한데, 정말 지각하진 않겠지…!
 
 
*
    
   
 "다녀왔습니다."
 "오냐."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나를 반기며, 티비를 보고 있던 엄마가 이쪽을 바라봤다. 
    
   
 "아침에 지각했어?"
    
   
 제일 먼저 묻는 것이, 아마 오늘 내내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뿌듯하게 허리에 손을 올리고 대답했다.
    
   
 "죽어라 뛰어서 통과했지."
 "어유. 잘했다."
   
    
 비꼬는 듯한 말투였지만 기분 나쁘게 들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 밖에서 엄마가 게임하려는 거면 작작하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치만 오늘은 꼭 엔딩을 봐야 한다고. 이번에야말로 베드 엔딩과는 바이바이 하겠…, 
    
   
 "…어?"
    
   
 컴퓨터 앞 의자에 앉아, 전원을 넣으려던 나는 의아함을 느끼고 마우스를 움직였다. 이내 떠오르는 바탕화면에, 컴퓨터가 줄곧 켜진 상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맙소사, 전기세가 대체 얼마야. 
 
 어지간해선 완전히 꺼진 것까지 확인하는데. -그러고 보면 어제는 꿈에서까지 게임을 했었지. 게임 캐릭터가 말을 걸다니, 그런 묘한 꿈이 또 있을까? 라고 해도 내가 게임 캐릭터가 되는 꿈도 언젠가 꿔 본 적이 있던 것 같은데. 
 
 어쨌든 지금 신경 쓸 것은 플레이를 시작한지 사흘이 넘어가는데 아직까지 공략캐의 엔딩 하나 못 본 이 게임이다. 내가 나가떨어지나 공략을 성공하나 기로에 놓인 문제라고.
 
 
 그리고 이번엔 정말로 엔딩을 봤다. 얼룩토끼 지우의 굿 엔딩.
 
 "아싸."
 
 엔딩음악 후 뒷이야기까지 전부 읽어 내리고 타이틀로 돌아와서, 잠시 기쁨에 젖어 주먹을 쥐었다. 엔딩 하나 본 게 이렇게나 기쁠 수가. 한 우물만 파는 게 정석이구나. 좋다. 좋아.
 
 이제야 제대로 게임에 대한 감이 잡힌 기분이다. 
 
 새로운 캐릭터를 플레이하기 위해 뉴 게임을 눌렀다. 이번엔 지해를 플레이해볼까…! 
 
 
*
    
   
 "…어째서."
 
 동아리 방, 익숙한 스탠딩 CG. 나는 절망에 빠져 고개를 숙였다. 어째서어어어어…!!
 
 치지직, 치직
 
 헤드셋 너머로 노이즈가 울린 것 같았다.
 
 고개를 들자, '원래'의 대사가 넘어가고 새로운 노란 텍스트가 나타났다. 
 
 
 「바보죠?」 
 「능력치 충족은 한 거예요? …못했으니 여기로 빠졌겠지.」
 
 
 할 말이 없습니다…. 책상 위로 몸을 늘어뜨리며 화면을 바라봤다. 클릭하지 않아도 멋대로 대사가 넘어가고 있었지만, 이미 한 번 겪은 일이기 때문인지 적응력이 빠른 건지 나는 이 상황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는건 이번에도 역시 꿈이지? 또 언제 잠든 걸까…. 
 
 
 멍하니 생각하면서, 혼자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있는 희재의 스탠딩CG를 커서로 두드렸다. 무난하게 어깨 부근을 건드렸는데, 효과가 있었는지 반응이 곧장 대사 창으로 올라왔다. 
 
 「뭐…. 뭐하는 긴데요?」
 
  어, 사투리다. 어쩐지 재밌다고 생각해서, 이번에는 볼 부근을 누르고 드래그했다. 캐릭터의 얼굴에 홍조가 떠오르고, 대사 창엔 좀 더 당황한 투의 텍스트가 올라온다. 그것을 몇 번 반복하면서-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웃어버렸다. 
 
 커서의 움직임 정도는 느낄 수 있는 걸까? 손을 대신하는지도 몰랐다. 선택지 형식의 게임이라 따로 뭔가 입력할 부분은 없어서, 아마 이쪽의 의사는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 없겠지만. 근데 또 꿈에서 이런 걸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웃기네. 
 
 이상한 일이다. 그렇지만 나쁘지 않았다.
 
 
*
 
 아침이 되어 눈을 뜨고, 곧 뻐근한 느낌에 상체를 일으켜 고통을 호소했다. 윽…, 아…. 오늘은 결국 게임하다 그대로 잠든 건가…? 마우스를 움직이자 암전해있던 화면이 켜졌다. 용케 게임은 종료했나보네…. 시간을 확인하고 느긋하게 컴퓨터를 종료했다. 평소 깨던 것보다도 이른 시간이었다.
 
 "하암."
 
 졸려….
 
 덴더라이언을 플레이한지도 일주일 반. 잠은 부족했지만 캐릭터에의 엔딩은 착실하게 모여 가는 중이었고, 그것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목소리에 빠져 이야기를 진행하지만, 어째선지 나는 희재에게 신경이 쓰였다. 엔딩 자체가 베드 엔딩으로 이어져서 볼수록 악감정이 쌓일 수순의 캐릭터인데, 이젠 확실히 게임에 익숙해져서 단번에 캐릭터 엔딩을 볼 수 있음에도 나는 일부러 능력치 미달로 베드 엔딩 루트에 빠지곤 했다. 
 
 같은 대사와 목소리로 '희정'이에게 고백하는 것을 반복할 뿐인데. 싫지 않은 건 일주일쯤 전에 연달아 꾼 꿈 때문일까. 
    
   
 …꿈?
   
    
 문득 뭔가가 떠올라 책상 위를 살폈다. 구석에 처박힌 메모장을 찾아내 뒤적였다.
 
 - 능력치
 - 정보 창 확인.
 - 어장관ㄹ
 
 "……."
 
 쓰다 만 내 글씨체의 메모를 확인하고 갑작스레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 ……, …하아.
 
 
 숨을 한 번 내뱉고서야 머리가 다시 돌아가는 것 같다. 
 
 "……."
 
 말없이 다시 컴퓨터에 전원을 넣었다. 부팅이 완료 된 화면에서 게임의 시작아이콘을 찾고, 시작되고 나타난 타이틀 화면에서 세이브데이터를 불러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도 잊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루트를 플레이했지만, 똑같은 대사 이후 뜨는 베드 엔딩이라는 글자뿐…. 포기하고 엎어져 메모장을 바라봤다. 어째서 그런….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일일까? 
 
 치지직
 
 일전에도 들었던 노이즈가 어렴풋하게 귀에 들려와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벗어놓은 헤드셋을 머리에 쓰고 화면을 바라봤다. 베드 엔딩이라 적힌 검은 화면에서 동아리를 배경으로 희재가 서 있는 화면이 돌아왔다.
 
 「눈치 챈 것 같네요.」
 
 새롭게 떠오른 노란 텍스트가 천천히 눈에 박혔다. 현실이다. 그것을 체감하고, 전율이 이는 것 같았다.
 
 「어째서 이렇게 됐는지는 몰라요. 일종의 버그…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
 「자각하고, 내 존재를 알리고 싶어서 원래의 궤도에서 이탈했지만 사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죠.」
 「정해진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이곳을 어긋나게 하는 거니까.」
 
 희재의 스탠딩이 가까워졌다. 아마 이것이, 그가 나에게 닿을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 문득 나 자신이 어느 날 게임 속의 캐릭터일 뿐이라는 걸 알아버린다면, 하고 떠올려봤다. 내가 사는 세계가 누군가의 유희를 위해 만들어진 것뿐이라면. 그것만큼 절망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다.
    
   
 「선배만 보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자조적이었다. 단지 글자를 읽고 있을 뿐인데도 기분이 전해지는 것 같아서, 가슴께에 뭔가 얹힌 느낌이 되었다.
 
 「나는 선을 넘었어요. 알아봐야 좋은 건 없었는데.」
 「나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어요. 변하는 것도 없겠죠.」
 
 희재는 웃는 얼굴을 했다.
    
   
 「그래도 정말 나쁜 것만 있던 건 아니에요.
 진짜 당신에게, 전할 수 있었으니까.」
   
    
 치지직- 노이즈가 울리고 있었다. 어쩐지 작별인사라도 할 기세에, 스탠딩CG가 다시 멀어지는 것을 보며 모니터를 붙잡았다가 마우스에 손을 올렸다.
 
 
 「좋아해요.」 
   
    
 치지지직─
    
   
 강한 노이즈를 끝으로, 화면이 암전했다. 약 2초간의 시간 후, 돌아온 것은 홀씨 날리는 타이틀 화면이었다. 세이브 데이터를 불러와 다시 베드 엔딩 루트로 진입했다. 모습을 보이는 희재가 반가운 것도 잠시, 그는 '원래'의 대사를 내뱉어 고백하면서 엔딩을 맞이했다.
 
 …없다.
 
 몇 번 반복하고서, 나는 결론에 도달했다.
 허탈해져서 게임을 종료하고 의자에 기댔다. 기분이 이상했다.
 
 
 
* 
    
 
   
 며칠간 인터넷을 뒤적이며 게임에 관련된 리뷰란 리뷰는 다 찾아봤지만, 나와 비슷한 현상을 겪었다는 글귀는 어디에도 없었다. 누구한테 얘기해봐야 미쳤다는 소리밖에 못 들을 게 뻔하고…. 의미 없이 책상 위의 메모장을 뒤적였다. 결국 혼자만의 비밀이 되는 건가. 중얼거리곤 펜을 들었다. 며칠 전의 날짜를 적고, 짧게 끄적여 글씨를 남겼다.
    
   
  -고백 받은 날.
 
 
 
 
덧글
작성자 : thdus223
2016-03-20 13:57:15
시인가요 아니면 우리를위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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